|
"요즘 유럽 위기 등으로 기업들이 상당히 위축돼 있습니다. 이 때문에 딜을 하더라도 가격이 조금만 올라가면 발을 빼버리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유로존 위기와 글로벌 경기침체가 장기화하면서 국내 인수합병(M&A) 시장도 빠르게 위축되고 있다. 전략적투자자(SI)로 나선 기업들이 미래 불확실성을 우려해 외형확장 대신 몸사리기에 치중하면서 M&A 협상 결렬이 잇따르고 있고 매물의 프리미엄도 크게 낮아지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올 상반기 국내 M&A 거래규모는 275억8,000만달러(약 31조4,400억원)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4.2% 줄었다. 거래건수도 401건에 그치면서 15.2% 감소했다. 특히 2ㆍ4분기 거래건수는 197건으로 지난 2010년 1ㆍ4분기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SI들이 과감한 베팅을 꺼리면서 경영권 프리미엄도 낮아지는 추세다. 올 상반기 국내 M&A 거래의 평균 프리미엄은 9.81%였고 2ㆍ4분기에는 6.94%로 크게 낮아졌다.
갈수록 낮아지는 프리미엄에 파는 쪽과 사는 쪽의 가격조건이 맞지 않다 보니 협상이 불발되는 사례도 잇따르고 있다. 전자랜드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던 이마트가 2일 협상 결렬을 선언했고 하이마트 역시 우선협상대상자였던 사모펀드 MBK파트너스가 가격 재협상을 위해 매각주관사인 씨티그룹글로벌마켓증권에 협상기간 연장을 요청했지만 씨티가 이를 거부하면서 인수계약이 파기됐다. 여기에 지난달 29일 본입찰을 실시한 웅진코웨이 역시 가격차가 쉽게 좁혀지지 않고 있어 유찰될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
이에 앞서 SK하이닉스가 일본 D램 반도체 회사인 엘피다 인수전에 뛰어들었으나 가격부담을 이유로 인수를 포기한 바 있다. 엘피다 인수 포기로 SK하이닉스는 미국 반도체 업체인 마이크론에 2위 자리를 내주게 됐지만 무리한 베팅이 오히려 독이 될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SI들이 과감한 베팅을 꺼리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경기침체에 따른 불확실성과 실적부진이다. 경기부진으로 인수대상 기업들의 실적악화가 불가피한 만큼 가격조정이 불가피하다는 게 대부분 SI들의 입장이다. 롯데의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다. 현금성 자산 1조5,000억원 정도를 쥐고 있는 롯데는 당초 성장동력 확보 차원에서 하이마트 입찰에서 강한 베팅을 할 것으로 예상됐으나 MBK파트너스에 비해 훨씬 낮은 가격을 써내면서 사실상 인수를 포기해버렸다. 롯데그룹의 한 관계자는 "내수시장이 위축되고 있는 상황에서 고가에 인수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며 "본입찰 때 써낸 가격이 적정가격이라는 판단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최근 들어 롯데그룹은 신동빈 회장이 비상경영을 선포하면서 M&A에 소극적으로 나오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신 회장은 최근 계열사 사장단 회의에서 "유로존 경제위기 확산 등 어려운 경제상황에 대비해 전 계열사가 비상경영체제에 들어가라"고 주문한 바 있다.
전자랜드 인수 계획을 철회한 이마트 역시 하이마트의 실적 하향세를 문제로 꼽았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최근 들어 기업들의 실적 전망치 하향세가 두드러지고 있고 하반기 실적 역시 불확실성이 크다"며 "주식시장에서 인수를 포기하거나 예비입찰에서 탈락한 SI들의 주가가 오르는 것도 투자자들이 불확실성이 큰 M&A보다 내실을 다지는 데 높은 점수를 주고 있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굴지의 기업들이 불확실한 M&A에 나섰다가 그룹 전체의 위기를 초래했던 과거 사례들 역시 인수 기업들이 지갑을 닫는 요인이다. 시장에서 대어급 물량의 거래가 크게 줄어든 것도 이 때문이다. 올 2ㆍ4분기 국내 M&A 딜의 평균 거래규모는 6,840만달러(약 780억원)로 상반기의 8,020만달러(약 910억원)보다 14.7% 줄었다. 한 대형 증권사 IB본부장은 "기업들로서는 대우건설 인수로 사실상 그룹 해체를 자초했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사례처럼 섣부른 기업 인수에 나섰다가 승자의 저주에 빠진 사례들을 반면교사로 삼을 만했을 것"이라며 "유럽 문제가 여전히 안갯속에 있는데다 중국의 경착륙 우려까지 겹치고 있는 상황에서 기업들이 선뜻 높은 가격을 주고 사업을 확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증권사 M&A 자문 담당자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장기화되면서 양질의 기업을 싼 가격에 인수할 절호의 기회가 오고 있다는 데 대부분 기업들이 동의하지만 아직은 바닥권이 아니라는 인식이 강하다"며 "대부분 기업들이 현금을 손에 쥐고 매물 가격이 더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