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ㆍ반도체는 한국이 세계 1등입니다. 적어도 이 분야에서는 코리아 스탠더드(Korea StandardㆍKS)가 글로벌 스탠더드입니다.” 송병락 서울대 명예교수의 한국적 가치에 대한 설명이다. 개방과 세계화를 통해 한국 경제를 선진화한다는 게 영미식 스탠더드의 모방은 아니라는 것. 송 교수는 “전략적 사고 없이 글로벌 스탠더드를 추종하다가는 덫에 걸려들 수 있다”며 “모방을 뛰어넘어 한국의 강점을 융합한 새로운 모델을 창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류 열풍에서 보듯 이미 한국적 가치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인정 받고 있다. 한국인의 높은 성취욕과 역동성, 공동체 의식에 토대를 둔 위기돌파 능력, 악착 같은 헝그리 정신 등은 글로벌 무대에서 존경심과 두려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키고 있다. 특히 불과 40년 만에 산업화와 민주주의를 동시에 달성하면서 한국형 개발 모델은 개발도상국에 전범이 되고 있다. 영미형ㆍ유럽형ㆍ일본형 등의 모방에서 벗어나 한국적 스탠더드를 창출할 수 있는 토대가 형성되고 있는 셈이다. ◇우리 스스로 무시하는 한국적 가치=“1960년대 한국은 가나나 수단처럼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당시 세계은행 보고서에서 남한은 경제성장 가능성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남한은 불리한 자연공간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경제기적을 이루어냈다.” 독일 고교 교과서의 내용이다. 실제 한국은 1950~60년 세계 120번째 빈국에서 불과 40년 만에 공업화를 이루는 업적을 세웠다. 현대경영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고 피터 드러커 교수는 “서양이 250년에 걸쳐 이룬 공업화를 한국은 불과 40년 만에 이뤄냈다”며 한국을 기업가 정신이 가장 뛰어난 국가로 꼽았다. 송 교수는 “한국인은 굶주림의 뜻을 아는 사람들이고 종합성ㆍ융통성ㆍ창의성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잘 어울린다”며 “특유의 역동성과 ‘빨리빨리’ 정신은 정보기술(IT) 강국을 만들었고 속도가 중요한 글로벌 경쟁력 시대에 적합하다”고 말했다. 또 우리 국민들의 높은 성취욕과 교육열, 쉽게 포기하지 않는 정신은 다른 나라에서 보기 힘든 강점이다. 미국 프로 풋볼의 한국계 스타 하인스 워드는 성공 배경에 대해 “한국인의 혈통을 갖고 태어난 게 얼마나 행운인지 모른다”며 “오늘날의 나를 있게 한 것은 한국적 가치였다”고 술회했다. ◇개도국에서는 이미 글로벌 가치=우즈베키스탄 주재 한 한국 외교관은 ‘그곳(우즈베키스탄) 젊은이들의 꿈은 대우자동차를 타고 삼성 애니콜로 전화하며 LG나 삼성 TV로 한국 드라마는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스스로는 한국적 가치와 시스템, 대기업들을 평가 절하하지만 해외에서는 닮고 싶은 모델 가운데 하나라는 얘기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모교 강연에서 “한국을 바라보는 내외부의 눈높이가 다르다”며 “(외부에서는) 우리를 허리 정도로 보는데 우리는 무릎 정도로 보고 있다”고 꼬집었다. 브랜드 전문가인 마틴 룰 벤처리퍼블릭 대표는 최근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아시아 기업인들을 만날 때마다 아쉬움을 느낀다. 왠지 그들은 주눅 들어 있다는 느낌이 든다”며 “문화유산 등 자신들의 가치를 미주보다 뒤떨어졌다고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아시아 고유의 가치야말로 경쟁력의 원천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고 충고했다. 특히 한국의 성장 모델은 선진국에서는 경이로움, 개도국에서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가령 한국의 새마을운동은 중국 농촌 근대화의 벤치마킹 대상으로 꼽힌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산을 또다시 푸르게 만든 나라도 한국을 빼면 거의 없다. 앤 크루거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부총재는 기회만 되면 “아프리카 여러 나라들은 반세기 만에 1인당 국민소득이 10배나 늘어난 한국의 발전 모델을 배워야 한다”고 언급한다. 200~300년 만에 산업화에 성공한 유럽 국가와 달리 하루가 급한 후발국에서는 한국이 세계 표준인 셈이다. ◇코리아 스탠더드를 글로벌 스탠더드로=지난 100년간 중진국에서 선진국 진입으로 성공한 나라는 일본과 아일랜드뿐이다. 특히 강소국인 아일랜드와 달리 일본은 한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의 후카가와 유키코 교수는 독자적인 가치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닛산이 도요타를 쫓아가지 못하는 것은 결국 남이 따라 할 수 없는 도요타 고유의 문화, 독자적인 가치 때문”이라며 “한국도 한류 같은 독자적인 부가가치를 담지 못하면 중국과의 가격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고 충고했다. 실제 도요타가 전세계 자동차 시장을 석권할 수 있었던 데는 맹목적인 글로벌 스탠더드를 추구하기보다 종신고용제 고수 등 일본식 경영을 유지한 게 주효했다. 미국 기업은 경제적 조직, 독일은 사회적 조직인데 ‘인간’에 바탕에 둔 일본식 장점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반면 한국의 경우 글로벌 스탠더드가 급속히 유입되면서 혼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일부에서는 영미식 스탠더드를 맹신하는 반면 일부에서는 국수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본부장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세계화 시대에서 보편적 글로벌 가치를 따라야 하지만 차별화가 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며 “차별화는 가장 한국적인 것을 찾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더구나 한국이 과거 선진국을 따라가는 ‘캐치업’ 국가에서 벗어난 만큼 선진국 진입을 위해서는 글로벌 시스템의 강점과 한국의 장점을 융합, 우리만의 모델을 구축할 필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 진대제 스카이레이크인큐베스트 대표(전 정보통신부 장관)는 “한국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해봐서 잘되면 그 방향으로 가는 실용적인 접근법이 필요하다”며 “지금은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췄다가 과거 우리의 장점이 많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가령 지금은 재벌체제가 비판 받고 있지만 과거 정부와 금융이 기업의 대규모 투자를 뒷받침했기 때문에 경제 발전도 가능했다는 말이다. 다만 한국적 가치를 강조하더라도 글로벌 무대에서 보편적 가치를 지녀야 한다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나준호 LG경제연구원 미래전략실 책임연구원은 “보편적 시각을 도외시한 채 한국적 가치에만 매몰되면 차별화는 자칫 독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웹2.0이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의 기술수준은 세계 최고지만 우리만의 표준과 전략을 고집하면서 세계 무대에서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