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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리즘의 명암] 5. 정치불안이 위기부른다
입력1999-06-18 00:00:00
수정
1999.06.18 00:00:00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돌아다니다 보면 흔히 눈에 띄는 것이 대통령 이름이다. 무슨 전체주의 국가에 온 것인 양 허름한 벽이나, 전봇대·게시판 할것 없이 조그만 공간만 있으면 메넴 대통령의 이름을 적은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있다. 카를로스라는 택시 기사는 『저게 무슨 포스터냐』는 질문에 얼굴을 붉히며 손으로 「X자」를 그었다. 메넴은 더이상 대통령을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대통령궁과 은행가엔 시위대가 폭죽을 터뜨리며 길을 막았다. 어로 쿼터제가 잘못됐다느니, 은행의 휴일을 늘리자느니 주장하는 시위대들이 시민들의 무관심 속에 전단을 뿌리고 북을 치며 요란했다.
바야흐로 아르헨티나엔 정치의 계절이 돌아왔다. 3선에 나서겠다고 욕심을 내던 메넴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정으로 욕심을 죽이자, 차기 대통령을 노리는 후보들이 우후죽순처럼 고개를 들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정략적으로 내뱉은 언행들이 취약한 아르헨티나 경제에 충격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달말 재무부 장관을 지냈던 도밍고 카발로씨가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지와의 인터뷰에서 『장래에 아르헨티나는 태환정책을 탈피, 변동환율제를 도입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 기사가 알려지면서 페소화 평가절하설이 급속히 유포됐고, 5월 19일 아르헨티나 주가는 4.3%나 폭락했으며 해외채권 가격이 3%나 주저앉았다.
게다가 집권당의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자인 에두아르도 두알데 부에노스아이레스 주지사가 카발로씨와 정치적 연합을 시도하자 페론당이 고정환율제를 포기할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됐다. 글로벌 투기자본들은 이 틈을 노렸다. 투기자본가 조지 소로스는 『태환정책이 아르헨티나 경제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으며 페소화가 실질가치보다 높게 평가되어 있어 경제왜곡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밝히자 남미 금융시장의 동요가 가속화됐다.
카발로 전장관은 자신의 발언이 큰 파문을 일으키자 다음날 고정환율제를 포기한다고 말한 적이 없으며 자신의 뜻이 왜곡전달됐다고 극구 변명했다. 대권주자인 두알데 지사도 집권하면 태환정책은 추호도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누차 강조, 금융시장 동요를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글로벌리즘의 주체는 국제금융시장이다. 하루에도 국경을 넘나드는 국제자금은 수 조 달러에 달하는데 이 가운데 90% 이상은 외환거래자들이 시장가격을 형성하기 위해 흥정에 붙이는 헛수의 자본이다. 그러나 이 헛수의 자본이 무서운 존재다. 실제 자본이 이동하지 않지만 상대국가의 흠이 보이면 일방적 방향으로 짓누르는 메가톤급 무게를 가지고 있다. 아시아와 러시아 위기시에 외환 딜러들이 마구 불러대는 가격이 한나라 경제를 파국으로 치닫게 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
90년대 이후 빠른 주기로 확산되고 있는 국제금융시장의 위기는 대부분 정치적 위기와 직결돼 있었다. 97년 11월 한국 경제 위기는 대선 직전에 터져나왔고, 지난해 여름의 러시아 위기는 공산당이 장악한 의회(듀마)가 경제개혁안을 거부한 직후 국제투자자들이 대거 빠져나가면서 확산됐다.
아르헨티나는 이웃나라인 브라질의 레알화 절하에도 불구하고 태환정책을 유지했지만 오는 10월로 예정된 대선이 큰 분수령이 될 전망이다.
아르헨티나 경제개발연구소(FIDE)의 엑토르 발레 이사장은 『정치인들이 90년대초의 경제대혼란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여당이든 야당이든 기존 정책의 유지를 주장해야 선거에 이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대선을 전후해 경제 위기가 심각해지면 정부가 달러통용제 쪽으로 방향을 바꾸더라도 달러와의 1대1 교환을 유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연초 브라질 위기도 정치적 위기에서 출발했다. 브라질 제2의 경제력을보유한 미나스 제라이스주가 연방정부에 대해 150억 달러에 달하는 채무 상환액에 대해 90일간 지급유예(모라토리엄)를 선언했다. 그 이면에는 이타마르 프랑코 주지사와 페르디난도 카르도수 대통령과의 알력관계가 깔려 있었다. 프랑코 주지사는 카르도수에 앞서 대통령을 지냈으며, 카르도수 현 대통령은 그의 각료로 재무장관을 맡았었다. 대통령 후보지명전에서 카르도수에 패배한 프랑코는 정치복귀를 위해 주지사에 출마, 당선됐었다. 주지사 취임후 프랑코는 빚이 많은 주를 연합, 카르도수의 연방정부에 정면 대항했다. 두 정적간의 갈등은 국제 자본의 두려움을 자아냈고, 결국 외국인 투자자들의 대거 이탈로 인한 레알화 절하로 이어졌다.
지난해 말 볼리바르화를 절하한 베네수엘라의 경우도 대선을 앞두고 집권세력이 인위적으로 고평가된 통화를 방어하려다 역부족으로 물러난 케이스다.
멕시코는 과거 네번이나 대통령 선거때마다 금융 위기에 빠졌고 95년엔 그 규모가 유난히도 컸다. 오는 2000년 7월에 다시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는데 이번엔 멕시코 정부가 외국 투자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아예 237억 달러의 차관을 사전에 미국과 IMF에서 빌려오기로 계획을 세우고, 협상중이다.
민주주의는 인류가 고안한 가장 훌륭한 정치제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글로벌리즘은 민주주의의 절차인 선거를 자신의 논리로 이끌어가고 있다. 글로벌리즘은 정치인들이 선거를 앞두고 자본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을 고집할때 순식간에 이를 처벌한다. 국경을 무너뜨리고 등장한 글로벌리즘은 한 국가의 정치 갈등을 재판하는 심판자로서 위력을 과시하고 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김인영 특파원 INKIM@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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