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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錄, 김우중신화 몰락] 낙화유수(落花流水), 사형 집행되다 이헌재 "회장님,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김영기 기자 young@sed.co.kr 관련기사 秘錄, 김우중신화의 몰락 [전체보기] ㆍ김우중 "명예롭게 퇴진할 기회를 주시오" ㆍ99년 7월초 이헌재와 '담판' 거센 저항 ㆍ경영권 포기담보 4兆 신규대출 등 얻어 ㆍ'7·19발표' 후에도 상황호전 기미안보여 ㆍ관료 주연-채권단 조연-대우 엑스트라 ㆍ'워크아웃 시나리오' 8월26일 현실화 1997년 3월22일 대우 창업 30주년 기념사. 김우중은 "대우의 역사는 신화도 환상도 아닌 창조, 도전, 희생의 대우정신이 땀으로 교직된 정합이었다"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낙화(落花)는 정(情)이 있어 흐르는 물을 따라 가고, 흐르는 물은 정이 없어 낙화를 흘려보낸다고 했던가. 99년8월26일. '킴기스칸'이라 불려질 정도로 세계를 누볐던 황제의 꿈은 외롭게 사라졌다. 변하는 시대를 거스르며 살기 위해 발버둥쳤던 김우중. 그에게 남은 것은 거친 가시면류관뿐이었다. “김 회장, 왜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까.”(김대중 대통령) “…” (김우중 회장) 99년 7월1일 청와대. DJ는 오랜만에 경제 5단체장을 불렀다. 한시간 반을 훌쩍 넘길 정도로 분위기는 뜨거웠다. 김 회장은 한 마디도 말도 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는 이미 두터운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고, 김 회장의 머리는 지끈거렸다. 막내린 세계 경영 사형 언도를 받기 전 죄수는 극도로 몸을 떤다. 워크아웃 결정 하루 전인 8월25일 청와대에서 열린 정ㆍ재계 간담회(왼쪽). 회의에 아랑곳 없이 먼 곳을 바라 보는 김우중 회장의 모습은 무엇을 암시하고 있을까. 32년 세월 그가 만들어낸 세계경영의 신화는 다음날 주채권은행장인 류시열 제일은행장이 워크아웃을 선언하는 방망이를 두드리면서 막을 내린다. /서울경제 DB 6월30일 삼성자동차의 벼락 같은 법정관리. 최후의 생존 카드로 삼았던 빅딜의 파열은 망치로 얻어맞은 듯 충격이었다. 이병철 삼성 회장과의 친분, 배신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그가 처한 상황은 그런 감정조차 사치스러웠다. 만기가 돌아오는 자금은 하루 수천억원으로 늘었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 죽을 수는 없었다. 이헌재 금융감독위원장을 찾았다. 두 사람은 모두 황제였다. 공직을 떠난 후 ㈜대우의 상무를 지내며 김 회장의 그늘 아래 있던 이헌재는 어느덧 ‘금융황제’(Banking czar)가 돼 있었다. 두 사람간의 1년여 지구전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 위원장은 시장에서 확실히 믿을 담보를 원했다. 경영권이었다. 김 회장의 저항은 거셌다. “언제부터 대우 재무제표 보고 돈을 빌려줬나요. 사업은 재무제표만 갖고 하는 게 아니잖?" 이 위원장의 대답은 명료했다. “회장님,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김 회장은 끝까지 버텼다. 실무 협상이 진행된 지 일주일 여 후인 7월16일. 베이징 출장을 마치고 이틀 전 돌아온 김 회장의 미간에 주름이 가득했다. 자금상황이 한계에 달했다는 보고. 방법이 없었다. 다시 이헌재를 찾았다. 여의도 금감위 11층. 김 회장을 영접求?이 위원장은 깍듯했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최종 담판. 탁자 위엔 김 회장의 재산 목록이 전부 적혀 있었다. “나는 돈에는 미련이 없습니다. 마음을 비웠어요. 당장이라도 자리를 버릴 수 있어요. 하지만 명예롭게 퇴진할 기회를 줘요. 내가 벌린 일이니 내가 해결하겠소. 3~4조만 주면 과실을 볼 수 있어요." 6개월만 시간을 달라고 애걸했다. 담판이 효력을 발휘했을까. 이 위원장은 마지막 기회를 줬다. 김 회장은 12개 계열사중 자동차 등 6개의 경영권을 담보 받았다. (경영권은 두고두고 논란이 이어진다. 김 회장은 8월 워크아웃 후에도 6개사는 자기 책임 아래 정상화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부 뜻과는 아랑곳없이.) 7월17일. 10여명이 남산 힐튼호텔에 모여 들었다. 금감원에선 김상훈 부원장-허만조 신용감독국장-한백현 팀장이, 제일은행에선 이호근 상무와 최형집 차장이 나타났다. 김용호 대우 구조조정본부 상무도 서류 뭉치를 들고 동석했다. ‘주연: 금감위, 조연 겸 무대장치: 제일은행(주채권 은행), 엑스트라: 대우’의 극본은 이렇게 완성됐다. 18일 종로 제일은행 본점. 일요일임에도 전화는 계속 울려댔다. 여신 담당자들의 컴퓨터 작업 속도는 빨라졌고, 모니터엔 다음날 채권단 회의 시간과 좌석 배치도까지 그려져 나갔다. 밤 늦은 시간. 작업은 끝났다. 전야는 심드렁하게 흘러갔다. 운명의 날, 7월19일 새벽 6시. A 은행장은 습관처럼 새벽녘에 눈을 떴다. 머릿속은 맡淪?다음날처럼 개운치 못했다. 힐튼호텔 3층 설악산룸. 장병주 ㈜대우 사장과 정주호 대우 구조조정본부장이 정중히 영접했다. 회의는 한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아침 식사가 준비됐지만 그릇을 비운 사람은 없었다. 오후 10시. 발표는 대우가 맡았다. ‘대우그룹 구조조정 가속화 및 구체적 실천방안’ 김 회장 명의였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실상 전 재산을 내놓았다. 구조조정이 실패하면 6개월내 퇴진한다는 경영권 포기 각서도 넘겼다. 손에 쥔 것은 4조원의 신규여신과 8조원의 단기채무 만기연장. 채권단 고위 관계자의 회고 한 토막. “진정 회생시키려 했다면 그리하지 않았을 거예요. 4조원은 코끼리 비스켓에 불과했어요. 시장이 죽음을 준비할 때까지만 목숨을 연장하려 했던 것 같아요. 부실채권 4조원만 쌓인 셈이죠.” 대우 워크아웃을 집도한 오호근 전 기업구조조정위원장의 발언도 비슷하다. “그래도 대우인데 유동성을 막아주면 어떻게 소생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착각과 환상이 정부와 대우 관계자들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 대우 발표 한시간 뒤, 이헌재 위원장이 기자실을 찾았다. “시한폭탄의 뇌관을 제거하는 작업을 막 시작한 것이야.” 한달 남짓 후 다가올 워크아웃을 머릿 속에 그리고 있던 것일까. 질문은 김 회장의 거취에 모아졌다. “자기가 벌인 것은 정리하고 떠나겠다는 말을 했다. 자동차를 제외한 모든 부분에서 손을 떼고 자동차도 기본방향이 잡히면 일선에서 떠날 것이다." 발표 이틀후인 21일. 전경련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를 찾은 김 회장은 기자간담회도 취소한 채 서둘러 상경했다. ‘대우자동차를 삼성에 넘긴다’는 역 빅딜론이 뇌리를 어지럽혔다. 경기고 동문인 박태준 자민련 총재를 찾아 마지막 구원을 요청했지만 대답은 신통치 않았다. 19일 발표 후에도 상황은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도리어 불안한 시장에 기름을 끼얹었다. 은행들은 움직이지 않았고, 투신사인 환매 사태가 벌어졌다. 김 회장이 내놓은 담보물을 놓고 ‘사재출연이냐, 사재담보냐’에만 옥신각신을 되풀이했다. 김 회장은 결국 19일 발표 엿새만에 담화문을 내놓았다. "초심(初心)으로 돌아가 무욕(無慾)의 자세로 경영을 조기에 정상화한 뒤 명예롭게 퇴진할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정부도 새 대안을 찾았다. 이 위원장과 은행장들간 면담이 이뤄진 27일, 김영재 금감위 대변인은 이례적으로 구조조정 주도권에 대해 언급했다. “대우가 주도적으로 구조조정작업을 진행하는 시기는 지났다.” 사실상의 은행관리 체제, ‘신탁통치’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비즈니스위크의 보도. “지난 몇 년 김우중이 수많은 함정을 뛰어 넘었으나 이젠 여행의 끝이 가까워오고 있다." 재벌 개혁을 향한 정부의 강도도 더욱 높아졌다. 8월15일. DJ는 광복절 경축사에서 재벌개혁의 기치를 높이 올렸다. 다음날엔 김태동 정책기획위원장이 거들었다. 국민의 정부 초기 경제수석을 지낸 대표적 재벌 개혁론자로 초기 구조조정을 주도한 ‘중경회’의 핵심 멤버였다. “재벌총수는 물론 금융기관 임원과 경제부처 고위관료까지 총체적으로 물갈이 돼야 한다." 비슷한 시기. 이헌재 위원장이 오호근 위원장을 찾았다. “형님. 대우를 워크아웃에 넣어도 괜찮겠습니까.” 일요일인 22일. 이날 삼청동 청와대에는 그리 궁합이 맞지 않는 세 사람이 모였다. 강봉균 재경부장관, 이헌재 위원장, 이기호 경제수석. 사흘후면 대통령 주재 정재계 간담회가 열리는 터. 획기적인 전환점이 필요했다. 결론은 대우의 조기 워크아웃. 택일만 남았다. 24일 새벽, 조기 워크아웃 방침이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정부는 부인했지만 시위는 떠난 상황이었다. 이날 오후. 베이징에서 돌아온 김 회장은 곧장 자신의 집무실을 찾았다. 정주호 구조조정본부장과 김태구 대우차 사장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망선고는 이미 내려진 상황이었다. 8월25일 청와대에서 열린 정재계 간담회. 김 회장의 표정은 잔뜩 굳어져 있었다. 대통령의 눈길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7월19일 6개사에 대해 빨리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최후 통첩을 한 상황이었다. 그 핵심이 대우차였다. 김 회장은 연초부터 GM회장을 가서 만나고 10조원의 협상가격이 나왔다고 애드벌룬을 띄웠다. 그러나 진척된 것은 거의 없었다. 대통령도 실망할 수 밖에….”(전직 장관급 인사) 간담회 후 김 회장은 곧장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수행원은 한명 뿐. 기자들이 모인 숲을 헤치고 프랑크푸르트발 비행기에 올랐다. 망자가 남긴 뒷자리. 25일 오후 6시 여의도 금감위 빌딩 10층에 금감원과 제일은행의 실무진, 워크아웃 박사인 이성규 구조조정위 사무국장이 모였다. 계엄 발동을 눈 앞에 둔 듯했다. 8월26일 오후 6시, 명동 은행회관. 은행장들은 한시간여 만에 대우 12개사 워크아웃을 결의했다. 온 나라를 들 끊게 했던 대우의 해체 작업은 허무하게 막을 내렸다. 입력시간 : 2005/06/15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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