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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리즘의 명암] 페론과 그의 아내들
입력1999-06-16 00:00:00
수정
1999.06.16 00:00:00
후안 페론은 2차대전 직후인 46년 『인민의 폭력은 정의』라며 노동자의 힘을 빌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앞서 노동부 장관을 역임할 때 페론은 노동자가 그의 정치적 기반이 됨을 깨달아 노동자를 조직했다. 사생아로 태어나 사창가를 전전하며 고생을 했던 여배우출신 에바는 페론을 도와 노동자를 조직화하는데 앞장섰다. 그녀의 사교술, 웅변술은 대중을 이끌기 충분했고, 페론이 군부에 구속됐을때 열열히 구명운동을 했다.페론은 그녀와 재혼함으로써 이념의 실천자를 확보했다. 페론 부부는 혁명과 야망으로 점철된 40년대 아르헨티나를 개조하기 위해 남미식 사회주의를 주창하며, 유럽에 뒤지고 있는 나라를 강력하고 부강한 나라로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민간 기업을 국영으로 전환하고, 노동단체에 막강한 권력을 심어줬다. 노조 조직율은 50%로 당시 어느 유럽국가보다 높았고, 노동귀족이 판을 쳤다.
에바는 페론이 재선에 당선된 직후인 52년에 자궁암으로 사망했다. 에바가 죽은후 아르헨티나는 극심한 무역적자에 시달렸고, 정치적 동지를 잃은 페론은 갈수록 급진성향을 드러냈다. 그러다가 13살짜리 소녀와의 추문으로 그는 학생과 교회의 강한 반발을 샀고, 55년 마침내 군부의 반발로 대통령직에서 하야, 파라과이로 망명했다.
페론 축출후 군부 통치가 지속됐다. 73년 선거에서 페론이 내세운 엑토르 캄포라가 당선돼 그는 귀국했다. 공항에 집결, 그를 기다리던 수백만명의 지지자들은 경찰과 충돌, 수백명이 죽는 불상사가 나자 캄포라는 즉시 하야했다. 다시 치러진 선거에 페론이 직접 나서 당선됨으로써 그는 18년만에 다시 대통령에 복귀했다. 그때 그는 세번째 부인인 이사벨을 부통령에 임명했다.
대통령 복귀도 잠시, 그는 74년 7월 급서했고, 부인 이사벨이 대통령을 이어받았다. 그녀는 전부인 에바만큼 유능하지 못해 극우파에 질질 끌려다녔고, 마침내 76년 3월 군부에 의해 축출됐다. 그후 13년후인 89년 카를로스 메넴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페론당이 다시 집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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