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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댔다 하면 틀림없이 고생할 것이다. 하지만 남이 손대기 전에 우리가 먼저 손대서 남 먼저 달려가야 승리할 수 있다.”(47년 1월 고(故) 구인회 회장) LG의 60년은 도전과 선택의 연속이다. 남보다 한발 앞서다 보면 리스크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지만 한발 한발 내디딘 발자국은 한국 자본주의의 새로운 역사가 됐다. LG는 국내 어떤 기업보다 먼저 선진 경영시스템을 도입했다. 50년 전인 57년 LG화학은 국내 기업 최초로 ‘대졸사원 공채’를 실시했다. 혈연과 지연 등을 배제한 채용방식은 당시 여타 기업들에 충격이었다. 69년에는 LG화학이 민간기업으로는 처음 기업공개를 단행한 후 70년 2월 증권거래소에 주식을 상장했다. 누구보다 빨리 주주 중심의 투명기업으로 첫발을 내디딘 셈이다. 연구개발(R&D)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도 어느 기업보다 빨랐다. LG전자는 76년 공장별ㆍ제품별로 분산됐던 연구소를 통합해 민간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중앙연구소를 설립했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국내 기업으로는 처음 81년 미국 앨라배마주 헌츠빌에 연간 50만대 규모의 TV 생산법인을 설립하고 84년 3월 LG상사가 석유개발공사 및 미국의 석유탐사 전문기업인 잭슨사와 합작으로 인도네시아 아당 지역의 유전탐사 및 개발사업을 시작해 국내 종합상사로서는 최초로 해외유전 사업에 진출했다. LG의 선도자의 위치는 2003년 지주회사 전환과 함께 빛을 발했다. 대기업 지배구조의 고질적 문제점인 계열사간 ‘순환출자’의 고리를 끊으며 지금도 쉽지 않은 지배구조의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경영전략의 선진화에 앞서 LG의 제품은 항상 국내 ‘최초’라는 수식어가 뒤따랐다. 47년 화장품 생산에 51년에는 플라스틱 가공 산업에 도전했다. 구인회 회장은 당시 “기업하는 사람으로서 남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손대지 못하는 사업을 착수해 성공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보람 있고 자랑스러운 일인가”라고 말하며 주변의 반대를 물리쳤다. 한국전쟁의 폐허를 딛고 LG는 59년 국내 최초의 라디오를 개발한 데 이어 60년 국내 최초의 선풍기, 61년 자동 전화기, 65년 냉장고, 66년에는 흑백 TV를 개발했다. LG전자의 한 관계자는 “당시 금성의 흑백 TV는 추첨을 해서 팔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전했다. 일상생활의 만족이라는 LG의 목표는 한국 화학산업의 역사를 다시 썼다. 66년 개발된 ‘하이타이’는 아직도 가루세제의 대표 브랜드로 통칭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76년 개발된 PVC 창호 ‘하이샤시’는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했다. 90년 이후에 95년 CDMA 휴대폰, 99년 TFT-LCD용 편광판에 이어 2000년대 들어서도 국내 제약사 중 처음으로 미 식품의약국(FDA)의 정식 승인을 받은 국산 신약 팩티브, 지상파 DMB폰, 타임머신 TV에 이르기까지 LG는 대한민국 산업의 역사와 같이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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