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과 노인 부양에 허덕이는 세계. 앨런 그린스펀이 바라본 미래다. 음울하기 그지 없지만 그린스펀은 동시에 희망을 말한다. 시련은 있어도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경제의 앞날은 밝다는 것이다. 과연 무엇이 맞을까. 한 입으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그린스펀의 진짜 의도는 어디에 있을까. 신간 '격동의 시대(원제:The Age of Turburbulence)'에 답이 있다. '신세계에서의 모험(Adventures in a new world)'라는 부제가 딸린 책은 앨런 그린스펀의 회고록. 미국 연방준비제도(FRBㆍ이하 연준) 의장으로 18년 7개월 동안 재임하며 세계경제를 이끌어온 그린스펀의 경험과 관록이 담겨 있다. 재임시 비유와 암시로 유명했던 그린스펀은 책에서는 보다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고 있지만 중요한 대목에서는 복선을 많이 깔아 놓아 미래가 어두운지 밝은지 헷갈린다. 예를 들어보자. '2030년까지 미국의 물가상승률이 평균 4~5%에 달한다. 어느 순간 두 자리 수를 돌파할 수 있다'와 '연준은 인플레이션을 성공적으로 관리, 성장을 유지할 것이다'라는 상반된 예측 중 어디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까. 의전적 수사어(修辭語)를 가려내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저자가 그린스펀인 탓에 책은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상태다. 840만 달러라는 선급금을 받았던 계약 당시부터 화제를 불러 일으키며 출간 이전부터 핵심 내용이 솔솔 빠져 나온 데다 영어판이 한달 전에 나오는 통에 중요한 대목은 대부분 소개된 상황이다. 역대 미국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서부터 한국정부가 돈놀이에 빠져 외환보유액을 속이는 바람에 1997년 외환위기가 초래됐다는 분석, 이라크 전쟁은 석유자원 확보를 위한 것이라는 단언 같이 미묘하고 자극적인 대목은 이미 알려졌다. 대문짝만한 활자로. 주요 메뉴가 동난 소문난 잔치의 김 빠진 맥주 격이지만 그린스펀의 회고록은 깊게 읽어볼 필요가 있다. 통화당국과 정치권간 주요 정책 결정에 관한 대립과 조정에서 미 연준이 경제 통계를 어떻게 가공하고 활용하는지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책 당국자나 시장 관계자, 경제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소득을 거둘 만한 책이다. 중요한 점은 미래. 그린스펀이 설정한 핵심 변수는 두 가지다. 베이붐 세대의 은퇴 이후의 미국 경제와 중국의 성장 지속 여부다. 그린스펀은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말하고 있지만 작금의 상황은 절망 쪽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 세계경제의 골디락스(고성장ㆍ저물가) 현상을 이끌었던 중국의 값싼 노동력이 공급하는 저물가가 사라지고 달러화 하락에 고유가 상황을 맞아 세계는 스태그플레이션(저성장ㆍ고물가)로 들어가는 분위기다. 불안한 미래에 대한 그린스펀의 처방은 명료하다. 사람에 투자하라는 것이다. 당장 교원 자격증 제도 같은 규제철폐를 통한 미국 초중등교육 개혁으로 고령인구를 부양할 인재를 양성하고 이민 장벽을 허물어 해외의 숙련인력을 끌어들이라는 것이다. 모두 735쪽에 달하는 분량 중 한국에 대한 내용은 합쳐야 1쪽에도 못미치지만 그린스펀의 처방전은 한국에 대한 맞춤용처럼 들린다. 김이 샜지만 책을 주목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세계경제를 심도 있게 진단하면서 한국의 미래를 가다듬을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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