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국내 대표적 보수학자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와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의 대담을 엮은 책이 출간됐다. 사제지간인 두 학자는 조선이 자생적으로 봉건체제를 타파할 여력이 없었으며 식민지배를 통해 근대화를 달성했다는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을 다시 강조했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1970년대 민족사학자들이 내세운 '자본주의 맹아론'을 비판하며 시작됐다. 자본주의 맹아론은 조선후기 사회가 자본주의로 발전하는 내재적 힘을 갖췄고 일본의 식민지배로 인해 조선 자본주의의 싹이 잘렸다는 이론이다. 자본주의 맹아론은 역사적 주체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조선 후기 사회발전상을 과장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책의 저자는 이 같은 자본주의 맹아론에 다시 눈을 돌린다. 이번에는 이중환, 유형원, 박제가 등 조선 자본주의의 씨를 뿌린 13명의 학자들의 업적에 초점을 맞췄다. 저자는 지리서 '택리지'를 저술한 이중환을 '지리경제학의 개척자'로, 토정비결을 쓴 이지함을 '조선 최초의 양반 출신 상인이자 중상주의 경제학의 선구자'로 재해석한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농업과 상업 지구를 분리하고 지역 특색에 맞는 경제정책 진단을 내렸기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주장. 특히 국제 무역로에 자리잡은 도시인 서울, 개성, 평양, 안주의 무역을 활성화할 필요가 있다는 이중환의 국제무역 진흥론은 탁월했다고 말한다. 또 효종 치하에서 영의정을 맡았던 김육을 분배주의 경제학자라고 치켜세운다. 폐단이 매우 심했던 토산물 납품 제도를 쌀로 갈음한 대동법을 전면적으로 실시해 조세 정의를 확립했기 때문. 김육은 화폐 주조를 진두지휘하며 조선 후기 화폐 경제 발달에 큰 영향을 끼친 바 있다. 그 밖에도 중상주의 실학자 유수원이 '인구 증가가 빈곤의 원인'이라는 맬서스의 이론을 270여 년전에 반박했다는 등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있다. 책은 중고생이 읽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이해하기 쉽다. '자본주의 맹아론' 등 한국자본주의의 뿌리를 설명하려는 이론이 골치가 아프다면 사례 중심으로 쓰여진 이 책을 통해 이해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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