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1위 골판지 포장 업체인 태림포장(011280)그룹이 지난달 전격적으로 IMM 프라이빗에퀴티(PE)에 매각이 결정됐다. 창업주인 정동섭(84) 태림 회장이 40년 동안 일군 회사로 남다른 애착을 보여왔기 때문에 관련 업계는 눈을 의심했다. 하지만 정 회장은 1년 넘게 직접 인수자를 물색하며 자신이 평생을 바친 회사를 파는 데 앞장선 것으로 알려졌다.
청춘을 바쳐 키운 회사를 곧 자신의 삶으로 여기며 결코 남에게 넘기지 않고 자녀 등 직계가족에게 물려주려는 창업 기업인들의 생각이 최근 크게 변화하고 있다. 오너 스스로 치열한 경쟁에서 회사의 생존을 담보하고 발전시킬 적임자를 찾아 회사를 매각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이다. 투자은행(IB)업계는 이 같은 배경에서 촉발된 기업 인수합병(M&A)이 전체의 10%를 넘어선 것으로 파악하고 창업주가 회사를 직접 매각하려는 수요를 공략하고 있다.
정 회장도 당초 가족에게 회사를 상속하는 방안도 고려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가 창업한 태림포장공업은 골판지 제조와 포장을 중심으로 14개 계열사를 거느린 중견 제지 업체로 지난해 매출 3,520억원, 순이익 179억원을 기록했다. 정 회장의 동생을 비롯해 장남과 차남, 사위까지 계열사 대표 등을 맡으며 경영에 참여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영권 승계와 상속 과정에서 친자식 같은 기업이 쪼개지고 기업가치는 추락할 가능성이 높자 통매각을 추진했다.
농우바이오(054050)와 우리로(046970)(옛 우리로광통신)도 상장 후 가족경영을 포기하고 매각을 했다. 지난해 농우바이오는 사모펀드인 IMM PE와 스틱인베스트먼트가 매각 입찰에 참여했지만 농협경제지주가 최종 인수자로 선정됐다. 농우바이오는 고(故) 고희선 회장이 지난 1967년 창업 후 국내 시장점유율 1위의 종자 업체였지만 고 회장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상속세 문제와 함께 미망인이 적절한 제3자에게 회사를 매각하는 것이 종자 주권을 지키는 길이라고 판단해 매각됐다. 고 회장도 생전에 "회사의 발전이 가족경영을 지속하는 것보다 먼저"라는 뜻을 피력했다고 한다. 우리로 역시 비슷한 사례다. 2012년 11월 코스닥 상장 후 다음해 3월 창업자인 고 김국웅 회장이 세상을 뜨면서 유지에 따라 상속 대신 투자자문 업체인 인피온에 매각했다.
2001년 심동희 회장이 창업한 코아정보시스템을 사모펀드인 소프트뱅크파이낸스코리아(SBFK)에 매각하며 화제가 됐지만 상속세나 2·3세의 경영 실패가 문제 되지 않는 한 창업주 스스로 회사를 파는 경향은 두드러지지 않았다.
김영진 M&A연구소장은 "은퇴하는 창업 1·2세대를 둔 중소·중견기업이 늘고 있는데 미국·유럽 등 선진국처럼 회사를 더 성장시키는 데 관심을 두고 오너가 M&A를 의뢰하는 사례가 증가하는 것은 기업과 자본시장 발전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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