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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산-수락산 이어 가기

2003/12/6/토/ 맑음 오후 바람. 나 홀로 등산로: 중계동 주공 8단지(10:08) – 중계본동 산동네 – 체력단련장(10:37) – 헬기장(11:25-45): – 수락산 정상 (507m) –석장봉 (12:25-32)– 406고지 – 야생동물 이동 통로(육교)(13:10-23) – 국궁장 쉼터 – 수암사 (14:00)– 도솔봉 (540m) – 수락산 정상(686m; 15:30) – 기차(홈통) 바위 – 석림사(16:30) 친구 음식점 개업으로 근교산으로 방향 틀어 오늘은(토요일;12월 6일) 아침에 비, 오후에 강풍이라는 일기예보다. 어제 오후 안내 산악회 따라 버스타고 멀리 갈까 말까 하던 차에 홍승표회장한테서 전화가 왔다. 오늘 문홍 도선사가 태능역 바로 이전 먹골 지하철역 근처에서 음식점을 개점한단다. 그래서 음식점과 가까운 불암산이나 가보자는 생각으로 쉽게 바꿨다. 서울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도 대부분 알고 있듯이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를 이루는 6개의 주요 산으로 북쪽의 북한산과 도봉산, 남쪽의 관악산과 청계산, 동쪽의 수락산과 불암산이 있다. 막내로 제일 낮은 불암산(507m)을 한번도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면식을 터 보자는 생각이 은근 슬쩍 들었다. 하루코스로는 좀 짧다 싶어 덕릉고개를 넘어 수락산 정상을 지나 의정부로 내려와 7시에 먹골역에 도착하면 되겠다는 대충의 윤곽이 섰다. 그러나 야생동물 이동통로인 육교를 무사히 통과할 지가 관건이다. 지난 5월 청계산-광교산 이어 종주 하려다 이음새를 제대로 못 찾아 한참을 헤매고서야 광교산 언저리에 들어서면서 총 11시간 반을 걷고도 광교산 주봉에 이르지도 못하고 하산했고, 검단산-용마산 종주 후 남한산성으로 넘어오겠다는 생각도 하산길이 어그러지다 보니 난감했던 일이 있어 일단 이동통로 통과에 최대 역점을 두었다. 부지런한 자아, 게으른 자아 설득하느라 애 먹어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니 일기예보가 마음에 걸려 선뜻 배낭을 메고 집을 나서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해가 짧아 적어도 9시 반부터는 어디가 됐던 들머리에 이르러야만 순조로운 산행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인데 게으른 자아가 통 말을 듣지 않는다. 가정생활 뿐 아니라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남과 부딪히는 일이 흔하다. 둘이서 또는 셋 이상의 단체 생활에는 생각이 달라 항상 격론도 벌어지고, 틀어지기도 하고 타협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게 나의 마음속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문제가 심각한 것 같으면 자아가 숱하게 많아져 싸우게 되고 문제가 단순하면 대개는 1:1이다. 그 싸움은 나 혼자만의 문제가 돼 ``고민``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고민이 커지면 골이 질근질근해진다. 평소 어느편(선과악, 게으름과 부지런함) 을 키웠느냐에 판세가 달라진다. 사실 혼자 산을 갈 때면 항상 가지 말자는 자아와 가자는 쪽이 크게 한판 붙는다. 온갖 핑계를 대며 게으른 자아는 집에 있자고 한다. 더욱이 오늘은 아침에 비가 온다고 했고 오후는 강풍이 불어 산 정상은 엄청 추울 게 아니냐는 것이다. 큰 눈이 온다는 대설(大雪)의 전날도 하나의 핑계다. 그런데 좀 부지런 떠는 자아는 그래도 집에 있으면 게을러 터지고, 뒹굴다 보면 골만 띵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아무리 작은 일이건 행동으로 옮겨 보람을 찾아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지런한 자아가 게으른 자아에게 가까스로 판정승을 거둬 40여분 늦은 8:40분에 집을 나섰다. 그런데 생각 밖으로 비가 올 것 같지 않고 날씨도 포근하다. 중계동에서 시작 9:40/ 중계역 하차/ 고속터미널역에서 장암으로 가는 7호선을 바꿔 탔다. 중계역에서 내려 가능한 한 능선 남쪽에서 시작하겠다는 의도다. 중계역에 내리니 1시간 지난 9:40. 학도암(鶴到庵)을 따라 올라갈 생각이었는데 지나는 사람들한테 물어보니 잘 모른다. 그래서 현대 아파트라고 하니 알려줘 청계초등학교, 불암중학교를 지나 대충 찾아 갔는데 아파트들이 산아래 깊숙까지 파고 들었다. 그런데 남쪽으로 난 도로가 산과 닿아있어 길 없는 산속으로 들어갔다. 서쪽을 보니 주공 8단지, 그 뒤로 현대 아파트 제일 가까이 길가에 ``청운 교회``가 있다. 10:08/ 들어서자 마자 무덤이 비석과 있고, 옆에는 영비각(靈碑閣)이란 현판이 딸린 비각이 있다. 옆에 길이 나 있는 게 보여 마음이 놓인다. 이제는 이 길만 따라가면 불암산 정상은 가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얼마 가지도 않아 엄청 열이 난다. 그도 그럴 것이 위는 런닝을 아래는 내의를 껴 입었으니 보통문제가 아니다. 안 얼어 죽으려고 겨울 등산복에 덕지덕지 입고 나왔더니 이런 결과다. 아주머니 셋이 내려간 다음 그냥 길가에서 아랫 내의를 벗어 배낭에 넣었다. 한결 가볍고 시원하다. 이제 더 더우면 위는 겨울 자켓을 벗으면 된다. 겉옷은 벗기가 쉽지 않은가. ``이 길로 가면 불암산 정상을 갈 수 있냐``고 지나는 한 아주머니에게 물었다. 갸우뚱한다. 북쪽을 가리키며 다시 내려 가 아파트단지를 지나서 올라 가란다. ``길이 전혀 없냐``고 물으니 산동네가 나오면 가로질러 갈 수도 있단다. 아무래도 아파트를 지나는 것보다 사람 냄새나는 산동네를 거쳐가는 맛이 나아보인다. 물어 물어 찾아가다 보니 도로가 나온다. 남으로는 서울산업대학으로 가는 길이란다. ``중심교회``란 이름의 교회가 길가에 보인다. 도로를 가로질러 산속으로 들어갈려는데 틈이 없다. 겨우 등산로 찾아 10:35/ 중계본동의 체력단련장 입구/ 그래서 산동네 골목을 따라 가다 가까스로 체력단련장이라고 쓰인 입구를 찾았다. 제 길로 들어 선 것 같다. 잠깐 오르니 최근에 만들어진 운동시설들이 보인다. 등산객 둘이서 공략할 준비를 한다. 이들도 불암산 정상을 간단다. 런닝을 벗었다. 더욱 홀가분하다. 소나무등 큰키나무 10종과 진달래 등 작은 키 나무 5종으로 이 자연 근린 공원을 더 잘 가꾸겠다는 중계본동 동사무소의 입간판이 있는 귀퉁이를 빠져나가 오르니 길이 있고 한 두 사람씩 내려온다. 물론 토요일이라서 대부분 아주머니들이다. 10:45/ 사격소리/ 리기다와 우리 토종 소나무들이 주종이다. 잎을 떨구지 못한 신갈, 상수리 등 참나무들이 사이사이에 들어서 조화를 이룬다. 철조망이 쳐진 남쪽 아래서 총소리가 둔탁하게 들린다. 군에서 사격연습중인 모양이다. 언뜻 사격장 비슷한 게 보인다. 등산길도 꽤 넓고 송림은 계속된다. 길이 넓고 경사가 거의 없어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편안한 워킹코스 11:00/ 학도암/ 서쪽 기슭에 절이 하나 큰 암벽 아래 보인다. 지나는 사람에게 물으니 내가 처음 산행기점으로 잡았던 학도암이란다. 11:15/ 능선을 따라 가볍게 올라가다 보니 이정표가 처음 나온다. (헬기장:300m/ 정상 1240m/ 학도암 1250m)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여 든다. 오른쪽 아래로 보이는 절은 천보암. 11:25-45/ 헬기장/ 10분을 더 올라가니 넓은 공터가 나온다. 한가운데 ``H``자가 있다. 한 쪽에는 돌이 많이 흩어져 있다. 범상치 않다. 이곳이 불암산 제 2봉인 봉화대(420m). 불암산 산성지로 대동여지도(1864년 제작)에도 표시되어 있다고 한다. 서쪽으로 높은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빛 바랜 ``천보 산장``이란 팻말 아래로 콘크리트 집 한 채가 있고 남쪽으로는 조그만 대피소와 간이 화장실도 간격을 두고 서 있다. 시야는 그렇게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서쪽 앙상한 나무 가지 사이로 중계동 아파트 단지가 숲을 이루고 있는 전경이 펼쳐진다. 동남쪽 묘지옆에 있는 조그만 돌에 앉아 보온병을 꺼내 커피한잔 타 바삭바삭한 셈비 과자를 씹으며 목을 축였다. 암반지대는 너무 기분 좋아 11:45/ 이제는 정상 공략이다. 발길을 북으로 옮겼다. 5분도 채 못 내려가 깔딱고개라는 이정표가 나오면서 다시 오르막 길이다. 거북바위라는 팻말과 함께 이제는 불암산 정상의 진면목인 암반이다. 거북바위를 지나 한 사람 빠져나갈 정도의 바위 틈을 지나는데 조그만 동판에 ``불암산을 사랑하는 육군 제 6915부대 장병들이 만들다. 1989, 7.1``이라고 새겨 바위에 붙여 놓았는데 코 앞이다. 홍보 만점이다. 발판 3개짜리 미니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읽지 않을 수 없게 돼 있다. 위험스럽다 싶으면 쇠를 박아 밧줄을 매 놓아 초보자도 큰 어려움은 없어 보인다. 넓은 바위 슬래브를 걷고 오르는 재미가 좋다. 특히 사람이 발 디디는 곳마다 샌드 페이퍼(sand paper)로 문질러 놓은 것처럼 화강암에 약간씩 홈이 파져 있어 한결 쉽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녔으면 그럴 까 하는 생각에 사람 발길이 그렇게 무섭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정상에는 태극기가 강풍에 부대끼다 마지막 정상은 조금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위에서 잡아주거나 아래서 잘 받쳐주어야 할 것 같다. 물론 잘 타는 사람은 별 것 아니고 여기까지 오는데도 능력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어려운 길로 올 수 있다. 서 너 개의 길죽한 큰 바위로 된 정상에 서니 바람도 꽤 세다.(507m) 구조대가 깃대를 높이 세우고 깨끗한 태극기를 달아 놓았는데 쉴새 없이 바람에 부대낀다. 정말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부자나라와 가난한 나라 산의 모습 능선의 서쪽과 동쪽이 대조를 이룬다. 서쪽은 온통 씨멘트로 만들어 놓은 성냥갑 같은 아파트다. 최근에 지은 것들이 많아 층 수도 높다. 동쪽은 남양주 별내로 도로가에 건물도 보이지만 논밭이 주가 된다. 10여년 전 LA에서 버스를 타고 샌디에고를 지나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 멕시코 국경 신흥 임가공 도시 티후아나에 간적이 있다. 강을 건너기 전까지 고속도로 양쪽으로 펼쳐진 산은 푸르게 가꿔져 있고 사이 사이 집들이 새가 둥지 틀 듯 들어서 있었다. 이게 부자나라의 모습이다. 그런데 강을 건너자마자 비슷한 높이의 산인데도 나무는 전혀 없고 메마른 토사에 판자집만 다닥다닥 들어서 있어 내 마음마저도 금방 황폐화되는 느낌이었다. 서울과 경기도(남양주군)의 경계를 이루는 능선을 따라와 이 불암산 정상에 서니 불현듯 그때가 떠오른다. 그게 부자나라와 가난한 나라의 차이점이었다면, 빈 땅이다 싶으면 여지없이 아파트 단지로 만들어 버리는 공룡 서울과 아직은 산이 막고 있어 훈훈한 농촌의 냄새를 풍기는 경기도와의 차이점이다. 30년 전만 해도 전답이었고 서쪽으로 삼각산과 도봉산, 동쪽으로 수락산과 불암산이 만들어 놓은 비옥한 분지였으며 중랑천이 젖줄 아니었던가. 앞으로 30년이면 불암산의 서와 동의 차이가 어떻게 변할까? 30년 전에 상계동과 중계동이 이렇게 아파트 숲으로 탈바꿈하리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나. 오래 생각할 겨를도 없다.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 사진 한 컷 못 누르고 내려오는데 간단치 않다. 앞에 내려간 등산객보고 배낭을 받아 달라고 해 놓고 오르던 사면을 역으로 밟아 내려섰다. 처음이라 무척 조심스럽다. 과거의 경험에 비추어 보면 다음에는 한결 쉬울 것이다. 삿갓모양의 이 불암산 상단이 슬랩으로 돼 있어 의외로 오르내리는 기분이 좋다. 정상을 한번 올려다보고 12:25-32/석장봉/ 북으로 내려서니 석장봉이다. 금방 오른 남쪽의 정상에 있는 사람들을 보니 아찔아찔하다. 동쪽 사면은 거무죽죽한 암반이 경사가 심해 록 클라머들에게 구미가 땡길만하다. 사진 한 컷 눌러 받았다. 불암산의 클라이맥스는 암반으로 이루어진 이곳이다. 절정에 이르면 정신없이 내려가야하는 것은 드라마든, 영화든, 연극이든 다 마찬가지. 이제부터는 덕릉고개 야생동물 이동 통로(육교)를 찾아가기만 하면 된다. 계속 서울과 경기도 경계인 능선을 따라간다. 무릎을 보호하기 위해 스틱을 꺼냈다. 406m 고지에서 잠깐 올라서다 이내 다시 내리막길이다. 올라오는 사람도 거의 없지만 만나는 사람에게 확인을 거치면서 오솔길을 따라 내려갔다. 길이 툭툭 떨어지고, 가는 밧줄도 곳곳에 놓여 있다. 나무의 변화도 노간주나무만 추가 됐을 뿐이다. 물론 한번은 길을 따라 오다 너무 서쪽으로 떨어지는 게 아닌가 싶어 다시 올라갔다 내려오기도 했다. 이정표가 없기 때문이다. 덕릉고개 가로지르는 야생동물 이동 통로 13:10-23/ 덕릉 고개/ 드디어 눈앞에 도로를 가로지르는 넓은 육교가 나타나고 건너편 부대 정문에 초병들이 서성인다. 이야기 들은대로다. 그런데 한 산행객이 통로가 아닌 서쪽에서 올라온다. 일행이 수락산과 불암산을 종주하기 위한 사전 답사차 왔는데 군 철조망에서 방향을 잘못 틀어 결국 서쪽 도로에 떨어지게 돼 이 이동통로를 지나지 못해 다시 도로를 건너 이 곳을 지나는 중이란다. 야생동물의 이동보다 등산객들의 이동통로로 보는게 훨씬 나아보인다. 일단 숨도 고르고 연료 공급도 해야 되겠다 싶어 배낭을 내려 놓았다. 기분이 여간 좋은 게 아니다. 오늘 등산은 다 한 거나 마찬가지다. 커피와 물, 초코 찰떡파이와 초코파이도 꺼냈다. 덕릉고개의 덕릉이라는 말이 예사롭지 않다. 수락산 동남쪽 끝자락에 있는 능이다. 왕과 관련이 있음은 능이란 말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덕릉 이야기 ``조선 중종의 막내이자 제9자(子)인 덕흥대원군은 생전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그의 아들인 선조가 즉위하였다. 선조는 아버지 덕흥대원군을 위하여 묘소만이라도 능으로 추존하고 싶어서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고 설득하여도 신하들이 이에 따르려 하지 않았다. 이에 선조는 하교하기를 「아버님되시는 중종께서도 등극하시었고 또 인군(人君)인 아들을 두셨는데 덕흥대원군이 설혹 왕위를 계승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능자시행(陵字施行)이 그렇게 어긋나는 일이 아니다.」 하며 신하들의 의견을 다시 물어도 역시 불가하다는 대답 뿐이었다. 이에 선조는 능으로 승격시키는 것을 단념하고 한가지 방법을 꾀하였다. 즉 동문 밖에서 시탄상(柴炭商)을 하는 한 사람을 불러서 명하기를 「가게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무수레와 숯수레를 불러들여 어디를 지나서 이 곳으로 왔느냐고 물어 그 장사꾼이 덕흥대원군 묘소를 지나왔다고 하면 그대로 보내고 만일에 덕흥대원군의 능을 지나왔다고 하면 안으로 불러들여 술과 밥을 후하게 대접하고 그 장사꾼의 나무와 숯을 고가로 사들이라」 고 하였다. 이 명을 받은 시탄상은 이 후 한번도 빠짐없이 그대로 이행하니, 이 소문이 한 사람 두 사람 거쳐 동편에 살고 있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오강시상(五江柴商)까지도 동편에 있는 흥인지문(興仁之門)을 일부러 찾아와서 덕릉경과(德陵經過)를 빙자하였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시탄상들이 너무 밀려오는 바람에 이 제도는 중단되었으나 이후부터 덕릉은 정식 반포된 묘소보다 더욱 우세를 점하게 되어 저절로 덕릉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양주군지편찬위원회 《양주군지》 1978 pp.1051-1052 에서) 파주의 소녕원(영조 모친인 숙빈 최씨의 묘로 최씨는 숙종때 궁내 무수리)에도 비슷한 일화가 얽혀있다. 길 잘못 들어 골짜기까지 다시 내려와 13:35/ 국궁장옆 쉼터/ 가벼운 마음으로 일어섰다. 철조망을 따라 올라가다 갑자기 내리막길이다. 정신없이 하강한다. 과녁이 세개 있는 국궁장까지 내려 왔다. 한가롭게 흐르는 개울을 건너니 화장실도 있고 벤치도 있는 쉼터다. 길가에는 ``수암사``로 가는 표지가 있다. 넓은 길이 씨멘트로 포장이 돼 있다. 나무들이 이름표를 달고 있지만 제복을 입고 멀리 서 있는 학생들처럼 구별이 쉽지 않다. 나뭇잎도 없고, 꽃도 열매도 없기 때문이다. 줄기를 보고 이름하고 대조해볼 뿐이다. 반도리, 조록 싸리 등의 관목들, 오리나무, 쪽동백, 개암남무 등의 큰 키 나무들. 엄동설한을 대비해 웅크릴 수 있는 데까지 최대한 웅크리고 있다. 14:00/ 수암사/ 한참을 하강했으니 같은 만큼을 가파르게 올라야 하는 것은 당연 지사. 숨을 헐떡이며 절 앞에 서니 중년 남녀가 있다. 절안으로 들어가 뒤로 계속 오르란다. 원광법사가 길지(吉地)로 잡고 창건했다는데 너무 비좁다. 이 곳에도 예외 없이 불사(佛事)가 한참이다. 주법당에는 법당 이름의 현판은 없고 ``一心으로/ 念佛한다``고 두 줄로 작은 판에 쓰여 있고 ``주승(主僧)은 없고 일하는 객만 둘이 있다.`` 뒤에는 이목구비가 후덕한 내 키 좀 넘는 미륵불이 서 있고 오른쪽 윗켠으로 삼성각 (三聖閣)을 지나 희미하게 길이 있다. 역시 가파른 통나무 계단을 올라가니 능선이 나온다. 길을 잘못 든 바람에 이 능선을 따라 왔어야 하는 데 힘들여 온 것이다. 어쩌면 길을 잘못 든게 다행이다. 다리운동과 심폐훈련을 더 많이 했으니 말이다. 14:05 철탑이 나와 잠깐 발을 멈추고 남쪽 불암산을 바라보니 실루엣처럼 부연하게 보인다. 그러나 일기예보와 달리 아침 비도 없었고 바람도 그렇게세게 불지는 않는다. 사람이 없어 호젓한데 낙엽이 쌓인 곳은 길인 것 같지 않아 불안하다. 불암산으로 건느려다 길 어긋났던 도솔봉 14:25/ 도솔봉/ 막바지 저 바위를 어떻게 오르나 했는데 어렴풋이 낙엽위로 길이 이어져 있다. 올라서니 앞에 도솔봉(540m)이 떡 버티고 있다. 한달 전쯤 수락산 정상에서 덕릉고개를 가려다 여기에서 길을 잘못 들고 한 할아버지 뒤를 따라가다 이상한 스랩으로만 갈려고 하길래 틀어 당고개로 내려 갔었던 곳이다. 이런 슬랩도 못 가면서 불암산 정상이냐고 핀잔까지 얻어들어 불암산 정상이 엄청 무서운 줄로 만 알았었다. 그 할아버지 다시 보면 해냈다고 이야기 해 드릴텐데… 이 자리서 디카를 꺼내 담아 봤으나 역시 불암산은 부연하다. 여러 형상의 바위들 14:40/ 치마바위, 코끼리바위, 남근바위, 하강바위/ 이 주능선은 여러 번 와 봐서 큰 걱정은 없다. 그런데 바람이 조금씩 세진다. 그러나 살을 파고 드는 차가움은 아니다. 바위 사면을 타고 3폭의 치마바위에 올랐는데 막걸리 아저씨가 안 보인다. 코끼리바위는 꼼짝도 안하고 집채보다 더 큰 바위상단에 완전히 엎드려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변함없이 긴 귀를 축 내리고 먹이를 찾으러 간 어미를 기다리는 겁을 먹은 듯한 새끼 코끼리 모습이다. 우리집 안방에 데려와 이번 겨울 같이 놀고 싶을 정도로 귀엽고 추위를 생각하면 안쓰럽다. 하강바위 아래에는 대형 남근바위가 멋지게 서 있다. 아마도 남성들은 너무 부럽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여자들은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겠다. 사진 한 컷. 철모바위 밑에서 다시 배낭을 끌러 놓고 커피에 건빵으로 연료를 보충했다. 그리고 올라서니 바람이 세다. 정상의 길목인 여기에서 라면, 막걸리를 파는 곳인 줄을 가늠을 못했다. 멸치에 막걸리 한잔 들이켰는데 더 춥다. 이제 바람이 위력을 발휘하겠다는 모양이다. 빨리 일어섰다. 정상에 바람만 세차게 몰아쳐 15:30/ 수락산(686m)정상/ 바람이 정말 세졌다. 날이 따뜻하면 사람들이 정상에 한참씩 앉아 있는데 이내 달아난다. 제자리서 한바퀴 돌고 나도 재빨리 북으로 향했다. 올라오는 사람들 보고 물어보니 석림사까지 40-50분이면 된단다. 너무 이른 것 같아 의정부까지 갈 요량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석림사 내려가는 길을 버리고 기차바위로 가 밧줄을 잡고 바위 사면을 내려가 다시 걸음을 한참 재촉했다. 시계를 보니 4시 10분전. 의정부에서부터 올라와 본적이 있는데 불현듯 해가 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후래쉬도 없지 않 은가. ``공룡능선 사망 산행기``도 읽었던 터다. 그래서 하산길이 나오자마자 무조건 방향을 서쪽으로 틀었다. 장암에는 매월당 흠모한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 흔적이 셋이나 사람도 없어 걸음아 나 살려라고 옆에 한눈 팔 겨를도 없이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가니 사람소리가 난다. 이 길이 석림사 가는 길이며 얼마 멀지도 않단다. 이제는 시간이 많으니 천천히 걸었다. 석림사를 한바퀴 돌고 내려오는데 길가에 안내판이 하나 서 있다. 청풍정유지(淸風亭 遺趾). 조성 후기 실학자인 서계 박세당(1629-1703)이 생육신 매월당 김시습을 추모한 나머지 배향하기 위해 충렬사를 짓고 유생들과 함께 학문을 강론 하던 곳이란다. 사다리꼴 모양의 주초석(柱礎石) 네 개만 남아 있다. 세상을 등진 김시습을 흠모했던 사람도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다. 매월당도 말년 수락산 내원암 근처에서 기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금 더 걸어내려오니 박세당의 조그만 6각정자인 석천동 (石泉洞) ``궤산정``이 건너편 물가에 서 있다. 조금 더 내려오니 말년 이 곳에 와 농사 지으며 후생을 가르치고 살았다는 집의 사랑채가 있는데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친구의 개업 음식점에 가서 쇠고기, 버섯의 샤브샤브에 소주한잔 마시고 집에 오니 밤 11시 30분. 에필로그 참 잘 다녀왔다는 생각이다. 부지런한 자아에 감사를 하고 싶다. 그러나 시간은 충분한데 해가 짧아 의정부까지 관통을 하지 못한게 좀 아쉽다. 그리고 350년전의 실학자 박세당 선생과의 만남이 너무 짧아 다시 한번 장암쪽으로 수락산을 올라가 봐야겠다. <채희묵 chaehmoo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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