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2일 이건호 국민은행장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날 가평 백련사에서 열리는 그룹 차원의 '템플스테이' 행사에 참석할지 고민이었다. 측근들은 참석을 만류했다. 하지만 '화합'의 장인 만큼 동참해야 한다고 생각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행사장에서 만난 임영록 KB금융그룹 회장과 이 행장은 단체사진 촬영에서 환하게 웃었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카메라가 사라지자 이 행장의 걱정은 현실이 됐다.
임 회장은 지주스님과 인사를 하면서 이 행장을 따로 소개하지 않았다. 순간 이 행장은 불편했지만 넘겼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불상사가 터졌다. 계열사 대표들이 회장과 한 방에서 자면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에 회장 측근들이 방을 따로 배정하려고 한 것이다. 이 행장은 이 대목에서 분노했다. 화합이라는 취지와 걸맞지 않은 행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행장은 행사 중간에 돌아가겠다며 폭탄 발언을 했다. 이번에는 은행 임원과 계열사 대표들이 만류하는 과정에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 행장은 결국 짐을 쌌다.
국민은행의 한 관계자는 "템플스테이에 참석한 이 행장은 임 회장이 자신이 계열사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어한 듯한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행사 중간에 나온 것"이라고 전했다.
임 회장은 결국 계열사 대표들과 한 방에서 자면서 템플스테이에 끝까지 남았지만 화합이라는 취지는 궁색하게 됐다.
금융감독원으로부터 경징계를 통보 받은 뒤 화해 분위기로 옮겨갈 것으로 예상됐던 KB금융의 집안싸움이 화해의 장소였던 템플스테이에서 폭발하면서 KB 내분이 또다시 불거지고 있다.
두 최고경영자(CEO)의 갈등이 다시 표면화하자 휘하의 임직원들까지 편을 갈라놓고 싸움을 하는 정황까지 다시 엿보이고 있다. 국민·주택은행 출신 간 해묵은 갈등이 이번에는 지주와 은행, 행장과 사외이사 간 갈등으로까지 번지는 등 그룹 전반이 심하게 표현해 '따로국밥'이 되는 양상이다.
이 싸움이 끝나려면 결국 한 사람이 백기 들고 나가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그룹 내분 경영진부터 사외이사, 휘하 임원들까지 번져=사실 금감원이 제재심의위원회를 열기 전 그룹 안팎에서 가장 걱정했던 점은 두 사람 모두 경징계를 받는 것이었다. 두 CEO가 모두 남을 경우 갈등이 언제든 폭발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래도 한가득 희망을 품게 한 것이 템플스테이였다. "적어도 불상 앞에서 자리를 같이하면 화해할 수 있을 것(그룹 고위임원)"으로 믿었다. 하지만 속에 쌓인 응어리까지 덜어낼 수는 없었다. 회장과 행장이 서로를 존중하지 않고, 인정하지 않는 상황은 여전했다. '예우'를 놓고 갈등이 생긴 것은 어쩌면 예고된 일이었다. 경징계로 인한 최악의 시나리오는 이렇게 시작됐다.
사실 주전산기 문제를 지적하기 전까지 회장과 행장의 갈등 국면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역으로 주전산기 문제를 놓고 임 회장이 "(유닉스로 전환해야 한다는) 이사회의 의견을 존중한다"고 얘기했는데 이는 이사회와 마찰을 빚었던 이 행장을 간접적으로 압박한 것이라는 얘기다. 서로 간의 불신의 골이 깊어진 것은 여기서부터였던 셈이다. 이 행장은 사석에서 "이번 문제는 절대 투명하지 않다"고 신념처럼 얘기했고 이는 금감원의 경징계에도 불구하고 검찰 고발로 이어지고 말았다.
문제는 현 내분 상황이 회장과 행장뿐만 아니라 사외이사와 은행장, 더불어 두 사람을 따르는 임원들의 편가르기까지 전방위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룹의 한 임원은 "은행 사외이사들이 은행장이 가져오는 안건에 사사건건 반대한다는 소리가 있다"고 전했다.
지주의 한 관계자는 "도무지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 콩가루 집안이나 다를 바 없다"고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다. 은행 내부에서도 행장을 두둔하는 쪽과 등을 돌리는 쪽으로 현격하게 갈라지고 있다. 한 관계자는 "국민·주택은행 간 투서가 난무하던 상황을 오히려 넘어서고 있다"며 "이러다가 그룹 전체가 내분에 휩싸일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한 달 전부터 고발장 준비…임영록 측 인사 숙청 시작되나=경징계가 확정된 후인 26일 저녁 이 행장은 임원 인사를 전격 단행했다. 임기가 만료된 부행장과 중징계를 받은 조근철 상무만 나가고 대부분 유임됐다. 그룹에서는 '탕평 인사'라는 얘기를 했다. 임 회장 측으로 분류된 임원들이 대부분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민은행 하반기 인사는 관례적으로 소폭 진행됐고 실질적으로 내년 상반기 인사에서는 이 행장의 의중이 반영된 인사 집행으로 대거 정리될 것이라는 말까지 흉흉하게 나오고 있다.
무엇보다 국민은행 측은 이미 한 달 전부터 김재열 KB금융 전무, 문윤호 부장, 조근철 국민은행 상무 등에 대한 고발장을 작성해놓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 행장은 다만 중징계가 확정되기 전에 고발 얘기가 나가면 논란이 더욱 커질 것을 우려해 이를 잠시 미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가 26일 국민은행은 리호스팅 방식의 유닉스 전환 기도 관련 범죄를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사전에 고발자들에 대한 통보도 없었다. 잘못이 명백한 임 회장 측 인사에 대해 칼을 겨눈 셈이다.
◇따로국밥 된 KB지주와 국민은행=KB금융의 한 고위관계자는 이 행장의 템플스테이 중도하차를 놓고 "옹졸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계열사 대표들은 은행장이 떠난 뒤 "이 행장이 우리에게 지금 줄 세우기 하는 것이냐고 말하면서 화를 버럭 냈다. 행장이 회장 대우를 안 해준다고 화를 내는 게 말이 되느냐"고 성토했다.
반면 국민은행 측은 "은행이 계열사 총자산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행장도 회장 못지않게 대우를 해줘야 한다. 최근 들어 그룹 차원의 배려를 찾아보기 힘들다"고 전했다. 지주와 은행이 따로국밥인 모습이다.
사실 이 같은 상황은 KB금융그룹 자체적으로 자초한 면이 크다는 지적도 있다. 어윤대 전 KB금융 회장과 민병덕 전 국민은행장의 경우 의전 문제에 있어 회장을 극진히 모시는 모양새가 자연스러웠다는 것이다. 사람이 바뀌고 상황이 변했고 화합이라는 행사 취지에 맞게 의전도 이뤄져야 하는데 여전히 회장 중심으로 돌아갔다가 사단이 났다는 것이다. 금융 당국의 한 관계자는 "의뭉한 회장과 교묘한 행장 간 싸움이 해결되기 위해서는 한 쪽이 백기를 드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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