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소공동 한국은행을 둘러싸고 사방에서 금리 인하의 노래가 거세지고 있다. 민간 연구소는 물론 당정청에서도 무언의 금리 인하 압박이 이어지는 실정이다. 코너에 몰린 한은은 일단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금융중개지원대출을 확대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하되 금리 인하 등 모든 카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하지만 미국의 금리 인상이 코앞에 닥친 상황에서 한은이 부랴부랴 추가 완화책을 검토하는 것은 실기라는 비판도 커지고 있다.
◇중기지원 확대 유력…금리 인하도 배제 안 해=벼랑에 몰린 한은은 일단 정밀 타격 카드인 금융중개지원대출 한도를 늘리는 것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한은 고위관계자는 8일 "현시점에서 금리의 추가 인하는 가계부채 증가 등 부담스러운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라며 "그러나 중앙은행으로서 경기회복세를 뒷받침하기 위한 다른 방안들을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15조원 한도의 금융중개지원대출은 지난 2월 말 현재 12조원가량 소진됐다. 과거 이 프로그램은 3조원가량의 한도를 남겨두고 증액되는 패턴을 보여왔다. 오는 12일 금융통화위원회 본회의에서도 한도가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다. 지난달 금통위 후 이주열 한은 총재가 "원화가 엔화·유로화에 대해 큰 폭의 강세를 보여 대일·대유럽 수출이 감소했다"고 지적한 점을 미뤄 일본·유럽과 교역하는 중소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나 현재 있는 프로그램 간 한도 조절이 단행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 금통위에서 금리 인하가 깜짝 단행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또 다른 한은 고위관계자는 "경기·물가지표가 좋지 않아 한은이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는 시점"이라며 "금융중개지원대출만 증액할지, 금리만 인하할지, 금리도 인하하고 대출 프로그램도 증액할지 모든 방안을 열어놓고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장에서는 이번 금통위에서 금리 인하 결정을 내리지는 않아도 최소한 금리 인하를 주장하는 소수의견이 나올 것을 예상하고 있다.
◇민간·당정청 금리 인하 압박=한은의 이 같은 움직임은 지난해에 이어 연초에도 경기가 주저앉고 디플레이션 우려까지 증폭되며 전방위에서 금리 인하 압박이 거세지는 탓이다. 4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현 경제상황을) 디플레이션 초기 단계로 볼 수 있어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며 "여러 전문가들이 금리 인하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며 한은을 강하게 압박했다. 심재철 새누리당 의원도 "한은이 디플레이션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겠다는 의지를 시장에 보여줘야 한다"며 "금리 인하로 가계부채가 늘 수 있지만 지금은 경기부양이 더 시급한 과제"라고 주장했다.
정부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같은 날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디플레이션에 대해 큰 걱정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전까지의 "지금은 디스인플레이션(물가상승률이 낮은 수준을 유지하는 상태)"이라는 데서 우려가 짙어진 것으로 한은의 금리 인하를 에둘러 표시했다는 해석이다. 주형환 기재부 1차관도 대구창조경제혁신센터를 방문해 "금리를 내리면 실물경제에 도움을 주고 실질금리도 낮아진다"며 "그럼 소비에도 영향을 준다"고 말했다.
청와대 역시 금융위원회가 최근 내놓은 '안심전환대출'로 가계부채의 질이 개선되고 총량도 억제될 것이므로 금리를 내릴 여력이 생긴 것 아니냐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외에 현대·LG경제연구원도 보고서를 통해 금리를 인하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지난해 화끈하게 내렸어야…실기 비판도=그러나 한은이 실기했다는 비판도 있다. 미국이 6~9월 사이에 금리를 인상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우리는 거꾸로 완화책을 내놓아 엇박자가 예상된다는 것이다. 최운열 서강대 교수(전 금통위원)는 "경제상황만 보면 금리를 내리는 게 바람직하지만 선제대응할 타이밍을 놓쳤다"며 "지난해 8월에 좀 더 과감한 인하를 해야 했는데 지금은 미국의 금리 인상을 앞두고 진퇴양난에 빠진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세계 각국이 금리를 경쟁적으로 인하했던 지난달 금통위에서 이 총재가 "환율전쟁은 아니다"라며 추가 금리 인하에 부정적 견해를 비칠 게 아니라 "우리도 나설 수 있다"는 신호를 줬어야 한은의 운신폭도 넓어졌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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