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바닥에 빠져 있는 경기를 띄우기 위해 정책조합(policy mix)을 시도하려 해도 복잡한 변수에 얽혀 정책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다차원의 덫’에 빠졌다. 경기 조절을 위해 사용하는 재정과 금리, 세제 등 이른바 ‘트로이카 정책’은 서로가 상충하는 요인들로 인해 정책 운용의 수단에서 멀어진 지 이미 오래됐다. 규제 완화와 투자 촉진책 등도 마찬가지의 운명이다. 대기업의 수도권 공장 신ㆍ증설 문제가 중앙과 지역이기주의의 충돌로 표류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덕수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지난 21일 관계부처 장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경제정책조정회의 모두 발언에서 “추경예산 편성은 세입을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을 갖고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처한 ‘다차원의 덫’이 매우 심각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발언이다. 정부는 연간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5%를 맞추기 위해 가용 가능한 정책 수단을 총 동원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특단의 돌파구를 어디에서 마련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문제가 되어버렸다. 한국경제가 저성장 국면에서 쉽사리 탈피하지 못할 것이란 경고음이 점차 요란해지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선 금리가 문제이다. 한국은행은 지난해 경기를 띄우기 위해 두 차례나 콜금리를 내렸다. 하지만 기대했던 경기 진작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유동성 함정’이 부분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정상적 상황이라면 1ㆍ4분기 성장률이 2%대까지 고꾸라졌기 때문에 금리를 추가로 낮춰야 하지만 언제부터인지 금리 인하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투기의 단맛이 가시지 않고 있는 부동산 시장의 거품을 우선 생각해야 하는데다 미국과의 금리차(0.25%포인트) 확대에 따른 자본 유출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한은도 추가 금리 인하가 약보다 독이 될 것이란 점을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고 금리를 올릴 수도 없는 형편이다. 부동산 투기를 잡으려면 금리 인상이 묘약이지만, 기력이 다해가고 있는 민간부문에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올 것을 생각하면 쉽게 꺼낼 수 있는 카드가 아니다. 한덕수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도 최근 “부동산 투기를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려면 많이 올려야 한다”며 금리 정책을 통한 부동산 투기 억제는 불가능함을 인정했다. 결국 ‘가만히 놓아두는 것’이 최선의 금리 정책이 돼 버렸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은 “금리 인상으로 경기가 고꾸라지면 비난을 감내할 수 없을 것이고 낮출만한 이유를 대기도 어렵다”며 “금리 정책은 한마디로 움쭉달싹 못하는 형국”이라고 표현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5%성장 묘수없어
경기부양위해 금리^세율내리면 투기등 우려
재정확대해도 일자리는 안늘고 금리부담만
“대통령이 국민에 정책 우선순위 제시해야” 금리가 정책을 운용하는 수단에서 멀어졌다면 다른 정책수단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나. 우선 조세정책을 보면 부동산 투기와 직결되면서 더욱 깊은 함정에 빠져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4일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아무리 어렵더라도 부동산을 통해 경기를 살리는 노력은 하지 않겠다”고 천명한 상황. 한덕수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부동산 투기는 막고 건설경기는 살리겠다”고 밝혔지만 현실적으로 이는 쉽지 않은 명제다. 박병원 재경부 차관보도 20일 브리핑에서 국민들의 심리를 살리기 위해 부동산 관련 세금을 조절할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렇게 하면 투기를 잡을 수 없다”며 정책당국의 고민을 드러냈다. 경기를 살리기 위해서는 법인세율이나 소득세율ㆍ부가가치세율 등 감세정책이 절실히 요구되지만 가뜩이나 경기부진으로 세수(稅收)가 부족한 상황이어서 어려운 실정이다. 실제로 1ㆍ4분기 세수진도율(목표 대비 세금징수 실적)은 전체 국세수입 예산 130조6,000억원의 22.7%에 그쳤다. 이는 2003년 25.4%, 지난해 23.8%에 비해 1~2%포인트 내려앉은 규모다. 정부는 이에 따라 특별소비세 인하조치를 6개월 연장하는 등 마이크로한 부분에만 손을 대고 있을 뿐이다. 재정을 통한 정책효과도 영 말이 아니다. 정부는 4월 말까지 총 66조4,000억원의 재정투자를 집행했다. 이는 전년동기보다 13조8,000억원이나 늘어난 규모로 연간 계획 대비 39.1%, 상반기 목표의 66.3%에 달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정작 재정 조기투입으로 기대했던 일자리는 올 들어 매월 평균 17만개에 불과해 정부의 목표인 40만개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앞으로 재정을 늘리는 방안도 한계가 도사리고 있다. 재정확대는 금리상승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재정을 늘리려면 채권발행을 확대해야 하고 이는 채권값 하락(금리상승)을 뜻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 1월과 2월 사이 정부는 외환시장 안정을 위해 통안증권 발행을 늘렸고 이는 금리상승으로 이어졌다. 한국은행이 정책금리를 올리지 않아도 시장금리가 올라가면 경기회복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금리ㆍ세제ㆍ재정 등 ‘트로이카 정책’이 이처럼 가로막힌 상황에서 남은 유일한 방법은 규제완화 등을 통한 투자확대와 민간참여 방식으로 이뤄지는 종합투자계획뿐이다. 하지만 이들마저도 운신의 폭에 갈수록 제약을 받고 있다. 20일 정부가 국내 대기업의 수도권 공장 신ㆍ증설 허용을 유보하면서 대기업의 최대 투자유인 장치가 사라져버렸다. 정부도 민간투자 확대를 위해서는 이 문제를 조기에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알지만 정치ㆍ사회적 변수에 얽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종합투자계획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올해 종합투자계획을 통해 성장률을 0.5%포인트 이상 끌어올릴 수 있도록 최소 3조~4조원 규모를 투자로 연결시킬 방침이었으나 실제는 2조원을 조금 넘는 수준에 그칠 것으로 보인다. 민간 건설업체들이 사업 자체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면서 참여를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J프로젝트 등 대형 국책사업들도 지지부진하기는 마찬가지다. 박 차관보는 브리핑에서 “국책사업들만 연초부터 집행됐어도…”라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현 경제상황은 왼쪽 오른쪽은 물론 앞으로 뒤로도 못 가는 다차원 딜레마에 빠진 형국”이라고 표현했다. 익명을 요구한 민간 경제연구소의 한 연구위원은 “5% 성장이 가능하다는 식의 무조건적인 낙관론은 오히려 비관론을 키울 수 있다”며 “현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경기 활성화를 위한 우선 과제를 설정해 국민들에게 제시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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