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에서 퇴직연금 물량을 받으려면 고금리를 제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퇴직연금 시장이 500조원 규모로 커진다고 하니 증권사들이 역마진을 보더라도 이 사업을 포기 못하는 거죠." (A증권사 퇴직연금팀장)
"퇴직연금 사업자들의 고금리 제시 경쟁은 10년이 지나도 안 변할 것입니다. 사업자 난립으로 자체 정화가 불가능해졌습니다." (B증권사 퇴직연금팀장)
퇴직연금 사업자는 증권사 16개, 은행 16개, 보험사 21개, 근로복지공단 등 총 54개사다. 누적된 퇴직연금은 약 72조원. 시장 규모에 비해 사업자가 지나치게 많다 보니 고금리 경쟁의 이전투구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최근 공시일 기준으로 현대증권·KDB대우증권은 확정급여(DB)형에 대해 퇴직연금 사업자 가운데 최고 수준인 3.8%의 금리를 제공하고 있다. 동부생명(3.45%) 등 보험업체도 3% 중반대의 금리를 DB형에 내놓고 있으며 기업은행(3.05%), 하나은행(3.05%) 등도 기준금리(2.5%)보다 높은 금리를 제공한다. 현재 기준금리와 원금보장형 주가연계증권(2.9%) 등을 고려하면 도저히 셈이 안 되는 장사를 하는 것이다.
은행·증권보험사가 고금리를 제시하는 게 수혜자인 퇴직연금 가입자들에게는 나쁠 게 없다. 하지만 '고금리의 함정'으로 인해 퇴직연금 가입자들도 수령 시점에 피해를 볼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최홍범 HMC투자증권 퇴직연금팀장은 "퇴직연금 사업자들이 제시하는 금리가 시중금리보다 높기는 해도 3% 중반에 불과하다"며 "3% 금리의 원금보장형 상품에 100% 투자해서는 물가상승률도 따라잡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결국 현재 퇴직연금 시장은 사업자와 가입자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셈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한 핵심 방안이 원금보장형 상품의 왜곡된 금리를 정상화시키는 것이다. 퇴직연금 사업자는 역마진의 구조를 탈피할 수 있고 근로자들은 펀드 등 실적배당형 상품으로 관심을 옮겨가 현재보다 높은 수익률을 기대할 수 있다.
금융당국은 퇴직연금 시장에서 왜곡된 금리를 정상화하기 위해 '자사상품 편입 금지' 카드를 내놓았다. 현재 신탁계약시 자사상품 편입 비중은 50%다. 즉 은행이 퇴직연금 물량을 자사의 예금상품에 편입할 수 있는 비중이 50%에 한정된다는 말이다. 내년에는 이를 30%로 줄이며 2015년에는 완전히 금지한다는 게 금융당국의 정책 방향이다. 퇴직연금 시장의 상위사업자인 은행이 자사의 예금상품에 퇴직연금을 넣지 못하면서 자연스레 실적배당형 상품에 투자할 수 있는 구조가 형성되는 것이다. 물론 현재도 은행끼리 암암리에 물량을 교환하는 일이 빈번한데 제대로 자리잡을지 의문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한 증권사 퇴직연금팀장은 "은행들끼리 서로 퇴직연금 물량을 주고받는 식으로 할 것"이라며 "은행의 예금형 상품에 퇴직연금 물량이 몰리는 상황이 유지되면 증권사들의 고금리 제시 경쟁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퇴직연금 사업자들은 이보다 강력한 대책인 '상품제공 의무화'가 시행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금융당국은 현재 '상품제공 의무화'와 관련된 정책 방향을 결정짓지 못하고 있다. 상품제공 의무화는 한 사업자가 요청하면 다른 사업자는 해당 상품을 반드시 제공해야 하는 것이다. 가령 한 증권사가 역마진을 무릅쓰고 4.5%의 원리금보장형 상품을 내놓았다고 치자. 다른 증권사들이 이 증권사에 해당 상품을 제공해달라고 요청하면 이 증권사는 동일한 금리로 상품을 줘야 한다. 다른 증권사 입장에서는 이 증권사에서 상품을 받아 그대로 팔면 손해를 보지 않고 고객도 잃지 않는다. 결국 고금리를 처음 제시했던 증권사는 고객 유인 효과는 없고 다른 업체들에 상품을 제공해야 해 막대한 손해를 본다.
박상규 한국투자증권 은퇴설계연구소 연구위원은 "상품제공 의무화가 시행되면 퇴직연금 시장의 왜곡된 금리가 정상화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며 "퇴직연금 사업자의 건전화와 근로자들의 소득대체율 확대를 위해 하루빨리 제도가 시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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