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을 기대해온) 아이폰 유저의 실망감이 제일 클 것입니다." 국내 스마트폰 제조사의 고위임원은 '아이폰5'에 대한 평가를 묻자 이같이 말했다. 전작들과 달리 눈에 띄는 신기술이 없고 하드웨어 사양도 삼성전자ㆍLG전자ㆍ팬택 등 국내 제조 3사보다 못하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애플이 12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예르바부에나 예술센터에서 자사의 첫 롱텀에볼루션(LTE) 스마트폰인 아이폰5를 공개했다. 지난해 10월 '아이폰4S' 이후 1년여 만에 공개된 신제품이지만 시장의 반응은 대체로 '환호'나 '감동'보다 '실망'으로 모아졌다. 시장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드웨어 사양은 언론 보도와 거의 일치했고 기능은 6월 개발자회의(WWDC)에서 공개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아이폰5가 공개된 후 전문가와 잠재 고객의 반응도 혹평에 가까웠다.
◇베일 벗은 아이폰5, 무엇이 달라졌나=아이폰5는 애플이 전작들에서 고수해온 3.5인치 디스플레이를 포기하고 처음 4인치로 만든 제품이다. 제품의 가로 길이는 기존 제품과 같지만 세로 길이를 늘려 화면 비율이 3대2에서 16대9가 됐다. 제품 외관은 더 얇고 가벼워진 것이 특징. 두께는 7.6㎜로 아이폰4S보다 18% 얇아졌고 무게는 112g으로 20%가량 줄었다. 애플 마케팅 담당 필립 실러 수석 부사장은 "지금까지 나온 제품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며 "세계에서 가장 얇고 가장 가벼운 스마트폰"이라고 소개했다.
아이폰5는 기존 제품들이 채택했던 30핀 커넥터 대신 크기가 80% 줄어든 '라이트닝' 8핀 커넥터가 사용됐다. 아이폰5에 연결해 쓰는 도킹 오디오와 케이스 등 각종 액세서리도 이에 맞춰 바뀔 것으로 전망된다.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는 'A5'칩보다 성능이 한층 개선된 'A6'칩을 탑재했다. 하지만 A6칩은 쿼드 코어가 아닌 듀얼 코어 제품으로 경쟁사 제품과 비교해 어떤 성능을 낼지 관심을 끌고 있다.
아이사이트(iSight)라는 이름이 붙은 카메라도 파노라마 모드와 빛이 적은 상황에서도 촬영할 수 있는 역동적 저광 모드를 장착하는 등 새로워졌다. 렌즈 덮개를 사파이어 수정으로 씌워 사진을 더 선명하게 찍을 수 있도록 했다.
애플은 또 이날 사람의 귀 모양에 맞춰 새롭게 디자인한 이어폰 '이어파즈'와 기존보다 작아진 충전 잭 '라이트닝'을 선보였다. 이 제품들은 번들로 아이폰5와 함께 제공될 것으로 보인다. 소프트웨어 기능에서는 6월 'iOS6'에서 선보인 3D 위성지도 '플라이 오버'와 내비게이션 '턴 바이턴'이 기본 탑재된다.
◇열정 잃은 애플, 경쟁사 제품 뛰어넘을지 의문=이날 아이폰5가 공개된 후 이찬진 드림위즈 대표는 트위터에서 "화면이 길어져 웹이나 동영상 등을 보기 좋아졌지만 한 손으로 쥐었을 때 위쪽 부분은 엄지가 닿지 않는 문제 생긴다"며 실망감을 표시했다. 애플이 2007년 첫 아이폰 출시 후 고수해온 3.5인치 화면을 버린 것에 대한 평가다. 생전의 스티브 잡스는 3.5인치 스마트폰이 한 손에 쥘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크기라고 주장했다.
아이폰5 출시 행사 자체에 대해 실망감을 표시하는 의견도 많았다. 정지훈 관동대 정보기술(IT) 융합연구소장은 "이번 발표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이전과 같은 두근거림이 사라졌다는 것"이라며 "애플은 제품보다 열정이 중요한 것을 잃은 것이냐"고 지적했다.
외신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IT전문 외신 시넷은 "애플이 경쟁사의 제품을 뛰어넘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밝혔으며 로이터통신은 "아이폰5는 보다 커지고 빨라졌지만 감탄을 일으킬 만한 점은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뉴욕타임스는 "아이폰5는 전작인 아이폰4S보다 디자인 부분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시리'와 같은 신기술을 탑재하지 못했다"며 새로울 것이 없다는 반응을 내놓았다.
◇애플의 향후 행보는 …TV 등에 주력할 듯=애플이 아이폰5에서 시장이 기대한 혁신을 보여주지 못하자 이제 스마트폰 이외의 다른 디바이스로 핵심 역량을 옮기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꾸준히 나온다. 특히 아이폰5 공개 이전부터 언론 보도를 통해 주요 사양이 공개되는 등 특유의 비밀주의가 약해졌다는 점에서 잡스 사후 애플의 조직 문화에 근본적인 변화가 시작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이번 제품이 시발탄일 수 있다는 분석이다. 유력한 차세대 핵심 제품은 TV다. 전문가들은 과거 잡스의 발언과 행보를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실제로 월스트리트저널(WSJ) 보도에 따르면 최근 애플은 타임워너 케이블 등과 애플TV 관련 협상을 벌이는 등 꾸준히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스티브 잡스는 생전에 미국의 케이블 사업자들과 제휴해 TV 셋톱 박스를 내놓으려는 계획을 세웠지만 시장이 무르익지 않았다고 판단해 추진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애플은 현재 99달러짜리 '애플TV' 셋톱 박스를 판매하고 있지만 이용 가능한 콘텐츠가 많지 않아 관심이 높지 않다. 향후 나올 제품은 지금보다 콘텐츠가 대폭 보강되고 새로운 기능을 탑재한 제품일 것으로 전망된다.
태블릿PC 사업 역시 중요한 축이다. 로이터통신 등은 애플이 연말 성수기를 앞두고 기존 아이패드 크기를 축소한 '아이패드 미니'를 선보일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이 밖에 포화 상태로 가고 있는 스마트폰 시장에서 전혀 새로운 범주의 제품을 들고나올 가능성도 점쳐진다. 한국의 스마트폰 보급률은 이미 60%를 넘어섰으며 미국 역시 지난 2ㆍ4분기 50%를 돌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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