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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전 과천 정부종합청사 내 기획재정부의 1급 및 주요 국장급 공무원들에게 비상호출 연락이 왔다. 박재완 재정부 장관이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 있는 집무실로 급히 부른 것이다. 원래 재정부 차관이 주재하던 '실물 및 자금시장점검회의'를 격상해 박 장관이 직접 주재하겠다는 게 호출의 내용. 박 장관이 느닷없이 사이렌을 울린 배경은 이날 아침 이명박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 석상에서 오간 발언 내용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유럽위기에 대한) 방어벽이나 펀더멘털이 충분한 상황입니다."(박재완 재정부 장관)
"지금 상황이 쉽게 생각할 문제만은 아닙니다."(이명박 대통령)
듣기에 따라서는 경제부처가 안이하게 대응해서는 안 된다는 대통령의 엄중한 질책으로도 풀이된다. 그동안 재정부는 최근의 대내외 경기흐름이 당초 예상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며 자신해왔지만 이 대통령은 보다 긴장할 것을 주문한 것이다.
재정부는 박 장관의 호출 직후 '시장에 대한 상시 점검체제를 집중 모니터링 체제로 강화하겠다'고 발표했다. 불과 1~2주 전까지만 해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긴박한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국은행도 이날 오후 부랴부랴 박원식 부총재 주재로 비상대책회의를 열고 국내외 외환ㆍ금융시장을 긴급히 점검했다.
이날 재정부가 내놓은 최근 경제동향을 분석한 '그린북' 6월호 역시 긴박한 뉘앙스가 곳곳에서 배어 나온다. 재정부는 그린북을 통해 "실물지표가 다소 회복됐으나 대외 불안요인 등으로 금융시장 변동성이 확대됐다"고 분석했다. 이어 "미국 등 주요국 경기 둔화 우려가 높아지는 등 대외 불확실성이 확대됐다"는 진단도 덧붙였다.
이에 따라 향후 정부 대응은 우선 금융ㆍ외환 부문의 변동성 최소화에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이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저성장 징후가 고용과 수출에 악재로 작용할 수 있음을 우려한 만큼 관련 보완대책도 추가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재정부는 정부가 과잉 대응하면 가뜩이나 민감해진 시장을 더욱 혼란스럽게 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당분간은 시장 상황을 보다 '밀도 있게' 지켜보다가 그리스 사태 해결 여부의 기점이 될 오는 17일 이후 구체적인 시나리오별 대응책(컨틴전시플랜)이 실행될 것으로 보인다.
금융시장 전문가들과 경제학계 관계자들은 정부의 향후 대응 방향이 '금융기관의 선제적인 추가 외화조달 유도, 외국인 자금 유출 심리 차단→수출기업ㆍ중소상공인의 자금경색 방지, 부동산시장 연착륙 유도→공공 부문 및 공공조달을 통한 고용ㆍ건설경기 위축 요인 흡수→최악의 경우 대규모 재정확대(추가경정예산 편성) 혹은 기준금리 인하' 등의 조합으로 짜여질 수 있다고 내다봤다.
권순우 삼성경제연구소 상무는 "아직은 정부가 섣불리 추경 편성을 하기에는 이르다"며 "우선 국내 금융기관들이 (외화) 유동성을 보다 선제적으로 확보할 수 있도록 해 금융불안 요인을 잠재우고 이후 스페인으로의 유로존 사태 전염 여부나 중국 경제 경착륙 여부에 따라 재정정책이나 통화정책을 쓸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준협 현대경제연구원 금융경제팀장은 "투기성 단기자금에 휩쓸려 외국인 자금이 우리 금융시장에서 일시에 빠져나가는 것을 차단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우리 금융시장이 어떤 일이 있어도 무너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정부가 줘야 한다"고 제언했다.
가계부채로 부동산 경기악화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해야 한다는 지적도 적지 않았다. 신민영 LG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가계가 대출 원리금 상환 압박에 못 이겨 주택 등 부동산을 대거 처분할 가능성이 있다"며 "정부의 선제적 대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박 장관은 이날 실물 및 자금시장점검회의 직후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우리 경제가 위기를 극복할 힘이 충분하다"며 시장의 동요 자제를 완곡히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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