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경제 침공을 막기 위해 단행된 지난 85년의 플라자합의. 미국은 세계의 경제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 아래 ‘양키 파워’를 여지없이 보여줬다. 하지만 상황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플라자합의는 원자재 가격을 폭락시켰고 엔화 환율의 폭락은 도리어 한국 등 개발도상국의 무역수지를 급격하게 끌어올렸다. 미국은 곧장 개도국으로 눈을 돌렸고 기존의 무역보호법인 301조를 고쳤다. 의회의 통상권한을 행정부로 이관, 불공정행위를 하는 나라에 제재를 가하는 내용의 ‘슈퍼301조’가 또 하나의 글로벌스탠더드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20년 가까이 미국식 질서는 아시아 외환위기와 전세계에 불어닥친 ‘경제적 애국주의’의 바람을 타고 더욱 맹위를 떨쳤다. 신(新)자유주의를 몸에 익힌 우리 관료들은 글로벌스탠더드로 위장된 미국식 질서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95년 11.9%에 머물렀던 외국 자본의 비중은 만 10년 만인 지난해 세계 최상위권인 40%까지 치솟았고 자본시장은 명실상부 외국 투기자본의 ‘황금어장’이 됐다. ◇범람하는 글로벌스탠더드=금융기관들의 살생 기준인 국제결제은행(BIS) 비율에 대해 정부의 한 당국자는 “(환란 이전) BIS라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며 쓴 웃음을 지었다. 수술도구가 뭔지도 정확하게 깨닫지 못하고 집도했다는 뜻이다. 민간연구소의 한 임원은 “헐값매각 시비에 휘말린 제일ㆍ서울ㆍ외환은행 등의 사례는 글로벌스탠더드에 대한 강대국의 논리와 우리 관료들의 무지함이 빚어낸 결과”라고 꼬집었다. 이헌재 전 부총리가 제일은행 매각 5년여가 지나서야 “뼈아픈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토로한 사실은 두고두고 곱씹어볼 대목이다. 글로벌스탠더드를 둘러싼 이런 식의 촌극은 손으로 꼽기 힘들 정도로 많다. 풋백옵션(사후손실보전)부터 시작해 현대투신 매각 때 불거졌던 ‘인뎀니피케이션(손실보상)’까지…. 여기에 집단소송제 등 투명성을 명분으로 한 낯선 도구들 속에서 우리 기업들은 허우적댔다. 미성숙한 아이에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히니 부작용이 속출한 것은 당연한 일. 집중투표제를 놓고 벌어진 KT&G와 칼 아이칸의 대립도 한 사례다. 이수희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본부장은 “순수 민간기업이었다면 집중투표제가 독이 돼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점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신중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스탠더드는 뜻밖의 아이러니도 만들어냈다. 소버린 사태로 정부가 지난해 3월 도입한 5%룰은 대표적 사례다. 정부는 미국 등 선진국의 제도를 모태로 이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제도 도입과 함께 외국에서 발끈하고 나섰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개정 5%룰에 대해 “정신분열적 증상”이라는 극언까지 내뱉었다. 정부 당국자는 “글로벌스탠더드도 외국 눈치를 보고 들여와야 할 판”이라며 쓴 웃음을 짓기도 했다. KT&G 사태 후 적대적 M&A에 대한 방어책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빗발치는데도 재정경제부 당국자의 입에서 “우리에게도 그런 걸 만들 힘이 있다면…”이란 자조 섞인 발언만 이어지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글로벌스탠더드는 외국 자본의 놀이도구(?)=IMF 체제 직후 정부는 ‘대규모 기업집단’이란 제도를 만들었다. 재벌들의 문어발 확장을 막는다는 구실이었다. 여기에 출자총액제한제도까지 도입되면서 대기업들은 무장 해제됐고 M&A는 남의 떡이 되었다. 국내 상장기업 10개 중 하나는 경영권을 위협받는 상황에 빠진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국내 시장이 외국자본에 얼마나 휘둘리는지는 이들이 투자금을 회수하는 방법을 보면 확연하게 알 수 있다. BIH는 98년 5월과 2000년 11월 대유증권과 일은증권을 2,200억원에 인수한 뒤 2002년 1월 두 회사를 합병해 사명을 브릿지증권으로 변경했다. 이때부터 BIH는 고배당(250억원)과 유상감자(1,725억원) 등 방법으로 자본금을 회수, 7년 동안 1,025억원을 벌어들였다. 그러나 BIH의 수익은 뉴브릿지나 론스타에 비하면 초라하다. 뉴브릿지는 제일은행 하나로 1조1,500억원에 달하는 차익을 챙겼다. 지난해 12월 결산 상장기업의 전체 배당금 8조5,878억원 가운데 외국인 주주들이 챙겨간 배당금은 3조6,860억원으로 42.9%에 달했다. 포스코의 경우 전체 배당액 중 외국인 비중이 74.2%(4,737억)에 이른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본부장은 “글로벌스탠더드는 미국식 경제시스템에 대한 암묵적 합의로 볼 수 있다”고 전제하고 “환란 후 지나치게 빨리, 무작위로 글로벌스탠더드를 받아들인 측면이 없지 않으며 이로 인해 현실에 맞지 않는 부작용들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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