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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의 슬기/오찬식 소설가(로터리)
입력1996-10-07 00:00:00
수정
1996.10.07 00:00:00
오찬식 기자
혼인사치가 극성스러운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듯 싶다. 가난한 사람들 마저도 권력자나 내로라하는 재벌들 흉내를 내려드니, 잔치 한번에 패가망신 하기가 예사다. 흉내란 원래 비지국 먹고 용트림하기 좋아하는 중생들 자존심에서 비롯되었다던가.정조임금 초년에 나라살림 잘하기로 이름난 정홍순이 우의정에 올랐을 때였다. 그의 딸이 과년하여 시집보낼 잔칫날이 다가오자 부인을 불러 상의하기에 이른다. 별당 아이를 시집보내려면 드는 혼수가 모두 합쳐 얼마면 되겠느냐고 시시콜콜 따져물었다. 비단옷과 패물, 그리고 살림살이 일부를 마련해 주자면 적어도 천 이삼백냥은 들어야 되겠다고 하자, 알았노라 철석같이 약속했다.
그런데였다. 약속된 날짜에 예단자투리는 고사하고 잔칫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어육 꼬랑지마저도 보이질 않았다. 그러면서 한다는 소리가 걸작이었다.
『장사꾼이란 거짓말을 밥먹듯 하는 모양이야. 그렇다고 재상인 처지에 저들을 벌줄 순 없잖아. 그러니 예복은 평소 집에서 입던 옷을 깨끗이 빨아 대신할 것이며, 음식 역시 평소 집에 준비되어 있는 술과 안주로 간략하게 혼례를 치를 수밖에 도리가 없겠구랴.』
사위 또한 이름난 재상의 아들이었지만 인색한 장인을 괴이쩍게 여겼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날 길을 가던 사위가 비를 만나 행길에서 가까운 처가에 들른 것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비는 좀처럼 그칠 가망이 없었다. 기다리다 못한 정홍순이 삿갓과 나막신을 사위에게 내주며 퉁명스럽게 내뱉았다.
『어서 집에 가서 저녁을 먹도록 하게. 내집에는 준비한 밥이 없고, 자네집에 차려 놓은 밥을 식은 밥 만들면서까지 새로 밥짓기를 기다리지 말게나.』
그후부터 사위는 처가와 담을 쌓고 살 수밖에 없었다.
몇 해뒤 관직에서 물러난 정홍순이 사위를 부르자 올리가 있겠는가. 급기야 바깥 사돈에게 서찰을 보내자 마지못해 장인을 찾아왔다. 사위와 딸을 맞은 정홍순은 마뜩찮게 문안을 올리는 그들앞에 집과 땅문서를 내놓았다. 엄청난 혼수와 잔치비용을 사치스럽게 낭비하기 싫어 매년 자리도 늘려 마련된 집과 백여섬씩 거둬들일 너희들 논밭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최근 공직자 자녀 결혼식장에 경비행기까지 띄웠다는 보도에 새삼 정홍순의 슬기가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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