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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41년 전인 1972년 8월3일 0시. 대한민국에는 세계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초법적 경제 쇼크요법이 발표됐다. 이른바 '8ㆍ3사채동결긴급조치'다.
이 조치의 핵심은 기업과 사채권자의 모든 채권ㆍ채무 관계가 8월3일 현재로 무효화되고 새로운 계약으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이 조치는 외연 성장 전략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함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임기 내내 '수출은 종교'라고 할 정도로 경제정책의 중심을 수출에 뒀다. 그 결과 한국 경제는 1970년 대망의 수출 10억달러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한다.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한국 경제는 1970년대 초반 세계 경기 불황이라는 혹독한 시련과 마주한다.
1969년 13.8%였던 성장률은 1970년 7.6%, 1972년에는 5.7%로 크게 떨어진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증권시장이 투기장화돼 있었고 은행 등 제1금융권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시중금리가 연 30~40%대까지 올랐다. 대기업이 지하의 검은 사채를 무리하게 갖다 쓰다가 도산 위기에 처하던 시기였다. 이 조치로 신고된 금액은 3,456억원으로 통화량의 80%에 달했을 정도다.
이 조치로 이자가 3분의1 수준으로 경감된 기업들은 재무구조가 개선되는 효과를 누렸다. 1971년에 394.2%나 되던 기업의 부채 비율이 1973년에는 272.7%까지 하락했다. 그동안 줄을 잇던 대기업 부도 사태가 진정되기 시작했고 1972년 하반기부터 수출이 증가세로 돌아서서 1973년 상반기에는 전년 동기 대비 91%나 증가하는 놀라운 신장세를 기록했다. 수출이 급신장한 후 한국 경제는 급속히 경기를 회복했다. 한때 5.7%까지 떨어졌던 경제 성장률은 이 조치를 계기로 1973년 다시 14.1%로 뛰어올랐다. 사채 동결이라는 특단의 초법적 조치를 통해 화급한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는 데는 성공한 셈이다.
하지만 경제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이 조치는 국가 권력이 개인 간의 사적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ㆍ수정했다는 점에서 많은 문제점이 제기됐다. 또한 긴급조치 실시로 기업의 체질 개선은 가져왔지만 재계의 도덕적 해이를 촉발하는 한편 금융의 합리적 배분 기능도 상실됐다. 특히 정부의 정책과 기업의 방만한 활동으로 말미암은 위기 상황에서 오히려 기업에 면죄부를 주고 그 부담을 국민에게 부과하는 방식으로 추진됐다는 점에서 형평성의 문제도 오점으로 기록됐다.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의 공약사항이기도 한 '지하경제 양성화' 5개년 실천 계획이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핵심 동력원인 FIU법(특정금융거래정보 활용에 관한 법률)이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했고 관계부처 합동 지하경제 양성화 태스크포스(TF)도 구성됐다. 박근혜 정부는 5년간 금융정보 활용, 조사 확대, 제도 개선 등을 통해 총 27조원의 추가 재원을 조달할 방침이다. 여기에 투기장화된 증권시장도 '양성화'돼 기업의 건전한 자금 조달 창구로 거듭난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선대 대통령의 시행착오와 결실을 경험으로 이번에 추진되는 지하경제 양성화는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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