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부터 현대상선의 싱가포르 현지법인에서 파견근무를 하고 있는 최택수 과장은 가끔 현지인이 이용하는 일반식당에 갈 때면 낮은 물가에 부러움을 느끼곤 한다. 현지식 점심 식사 한 끼 값이 동네 식당의 경우 싱가포르달러(SGD)로 3달러에 불과하다. 도심 내 식당도 4~5달러 정도다. 우리 돈으로 3,000~4,000원이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셈. 싱가포르의 1인당 국민소득이 두 배 이상 높은 점을 감안하면 현지인의 체감물가는 우리 국민의 절반 이하라고 할 만하다.
질투가 날 정도로 낮은 싱가포르의 물가는 적극적인 자유무역협정(FTA)을 통해 수입관세를 철폐한 데 기인한다. 우리나라 역시 주요 경제권과의 동시다발적인 무역협정과 이에 따른 관세장벽 철폐에 이어 오는 3월15일 미국과의 FTA까지 발효를 앞두고 있어 물가구조의 지형도가 대거 바뀔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유럽에서 수입되는 주요 품목의 소비자판매가는 지난해 하반기 우리나라와 유럽연합(EU) 간 FTA가 발효된 후 눈에 띄게 떨어졌다.
22일 기획재정부와 유통업계에 따르면 이마트에서 판매되는 EU산 냉동삼겹살의 경우 지난해 4~6월 판매가격이 100g당 1,180원이었으나 현재는 980원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 밖에도 유럽산 유제품을 포함한 주요 식료품ㆍ화장품ㆍ주방용품 등은 EU와의 FTA 발효에 따른 가격인하 요인이 있다고 정부는 분석한다.
한미 FTA의 경우 물가 변화폭이 더욱 크게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하반기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등 10개 국책연구원이 공동 수행한 '한미 FTA 경제적 효과 재분석' 자료를 보면 미국산 수입 품목 중 관세율이 높은 품목을 중심으로 향후 15년간 연평균 343억원의 소비자잉여 증가효과가 예상된다. 소비자잉여란 소비자가 지불할 의사가 있는 가격과 실제 구매가격 간 차이를 뜻하는데 해당 잉여가 는다는 것은 그만큼 체감물가 안정에 한미 FTA가 기여한다는 점을 시사한다.
미국산 오렌지의 경우 이마트에서 지난해 2월 1봉지(5~7개입 기준)당 3,880원이던 판매가격이 현재 작황 등의 악재로 5,480원까지 올라 장바구니를 무겁게 하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FTA가 발효돼 50%였던 관세율이 무관세(쿼터 물량 적용)나 30% 이하로 떨어지면 소비자가격도 최대 절반 가까이 하락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는 한미 FTA 발효와 맞물려 호주ㆍ터키ㆍ콜롬비아 등과의 FTA도 올해 내 타결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와도 3월 핵안보정상회의를 계기로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 (CEPA)'을 선언하는 등 무역협정 체결을 가속화할 계획이다.
이는 그만큼 수입물가의 하향 안정 요인이 증가하는 셈이고 결과적으로 한미 FTA가 국내 물가 지도의 그림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임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당장 현재 주로 국산 품목을 중심으로 집계되는 소비자물가지수의 산정기준이 변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물가 당국의 한 관계자는 "예를 들어 삼겹살의 경우 지난해 가격안정을 위해 할당관세를 적용해 수입물량을 적극 늘렸지만 관련 물가통계는 국산 위주로 집계되는 바람에 수입가격 안정 효과가 물가지표에 반영되지 못했었다"며 "앞으로 FTA 발효 국가가 확대돼 저가의 수입품이 증가하면 물가지표 산정시 해당 품목을 적극적으로 반영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FTA를 통한 수입가 인하분을 무역업자나 유통업자들이 마진 인상을 통해 가로챈다면 소비자의 후생증가 효과는 반감되고 되레 국내 관련 산업만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우려도 적지 않다.
실제로 프랑스산 노블메독 2009년산(750㎖)의 경우 이마트에서의 1병당 판매가격이 지난해 6월 1만9,900원이었는데 한ㆍEU FTA 발효 직후인 7월 1만6,900원으로 15.1% 떨어졌다 현재는 다시 FTA 발효 이전 가격인 6월 가격 수준으로 되돌아갔다.
홈플러스에서 판매되는 스페인산 아이스크림(테스코의 자체브랜드 상품)의 경우 지난해 7월 1통(1000㎎ 기준)당 4,500원이던 것이 현재는 6,900원으로 무려 53.3%나 뛰었다.
따라서 FTA에 따른 물가안정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정부가 관련 주요 수입품목의 소비자가격을 정밀하게 모니터링해 부조리한 유통구조가 나타나면 선제적으로 징벌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더불어 관련 가격 자료를 인터넷 등을 통해 소비자에게 주기적으로 제공하는 방안이 모색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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