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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십자각] 이리듐의 몰락?
입력1999-08-17 00:00:00
수정
1999.08.17 00:00:00
필립스는 90년대 초 TV로 영화나 게임을 즐길 수 있는 CDI를 내놓고 VCR를 대체할 것이라며 흥분에 들떴었다. 그러나 시장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CDI는 결국 참패했다. 국내에서도 「걸어다니는 공중전화」라는 시티폰이 나와 한국통신 등 사업자들은 수천억원을 투자했다. 하지만 지금 시티폰은 걷어치워야 할 상황이다. 이런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이리듐」이라면 전세계 통신업계를 매혹시킨 사업이다. 지구 760㎞ 상공에 66개의 위성을 띄워 이를 징검다리로 남극이건, 사막 한가운데건 휴대폰으로 통신할 수 있게 한다는 무소불통(無所不通)의 구상이다. 더 이상 새로운 것(SOMETHING NEW)은 있을 수 없어 보였다.
본디 그 아이디어는 모토롤러 소속 한 엔지니어의 부인에게서 나왔다.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그녀는 카리브해에 휴가 가서도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통신 방법이 없어서 남편에게 바가지를 긁었다. 「통신회사에 다닌다는 사람이 그런 것도 하나 해결하지 못하느냐」는 정도의 핀잔이었으리라.
그렇게 해서 나온 환상적인 아이디어에 도취한 모토롤러가 바람을 잡고, 세계 각국의 통신회사들이 속속 투자에 나서 거금 30억달러가 투입됐다.
그러나 이리듐은 지난해 11월 서비스를 시작한지 9개월13일만에 중대한 고비를 맞았다. 지난 13일 「파산 방지를 위해서」라며 법원에 화의나 부도유예협약과 유사한 법적 구조조정을 신청하고 만 것. 주주들과 채권단이 채무 조정에 적극적이고, 주주들도 추가 투자 의향을 밝혀 당장 이리듐 서비스의 중단사태가 빚어지는 것은 아니다.
설사 이리듐이라는 기업이 청산절차로 가더라도 투자자나 채권단이 건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리듐의 자산이라고 해봐야 하늘에 떠 있는 위성 뿐이다. 66개 위성들을 나눠서 가져가 봐야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 때문에 주주와 채권단은 어쩔 수 없이 회사를 살리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처지다.
이리듐의 파산, 청산 여부와는 관계없이 통신전문가들은 대부분 이리듐을 「실패한 사업」으로 규정한다. 이리듐은 서비스 개시 후 지난 3월말까지 전세계에서 1만294명의 가입자 밖에 확보하지 못했다. 올해 1·4분기에만 무려 5억500만달러의 순손실을 냈다. 지금도 가입자는 3만명을 겨우 넘는다.
결국, 이리듐은 기막히게 신기하고 새로운 것이지만 전세계를 통틀어도 시장은 고작 몇만명 수준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모토롤러는 사업 초기 몇백만명의 가입자는 문제없다고 큰소리쳤지만 뚜껑을 열어본 즉, 예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요즘 휴대폰보다 4배나 무거운 아령같은 단말기, 국제통화 1분에 5,000원이라는 초고가 요금이 시장에서 통할 것이라고 그들은 믿었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철저히 외면했다. 모토롤러는 각국 통신시장의 차별성을 무시하고 전세계 마케팅과 홍보를 미국식으로 일원화하여 집행했다. 「기술의 승리」가 「시장의 승리」를 이끌 것이라는 오만과 자가당착에 빠졌던 셈이다.
요즘은 「새로운 것」의 인플레시대다. 새것이 아니면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그러나 새로운 것은 옆구리에 「함정」도 끼고 있다.
이재권 산업부 차장JAYLEE@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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