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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맛
입력2002-06-05 00:00:00
수정
2002.06.05 00:00:00
유대인들은 가장 큰 명절로 유월절(踰越節)을 꼽는다. 4백30년 간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기원전 13세기경 모세의 인도아래 이집트를 탈출한 일을 기념해서 정해진 7일간의 명절이다.
특이한 것은 이 기간에 먹을 수 있는 음식이 6가지로 제한 돼 있을 뿐 아니라 그 중에는 쓴 나물과 누룩을 넣지 않은 맛없는 빵이 필수 음식으로 들어 있다는 점이다. 노예생활을 하던 때의 괴로움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 한다.
2천년 가까이 나라를 잃고 유랑하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이란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던 원동력도 바로 쓴 나물과 맛없는 빵으로 상징되는 유월절 고난극복의 정신에서 비롯됐다고 유대 학자들은 보는 모양이다.
이 같은 견해의 옳고 그름은 재단하기 어렵지만 전쟁이나 게임에서 졌을 때 그 패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그 나라나 민족 혹은 집단이나 개인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그리고 실패를 당당히 받아들이고 거기에서 교훈을 얻고자 했던 유대인의 선택이 지혜로웠다는 데도 별 이론이 없을 듯 하다.
유대 사회뿐만이 아니다. 중국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의 고사에서 나온 '장작 위에 눕고 쓸개를 핥는다'(臥薪嘗膽;와신상담)는 말도 패배의 쓴맛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하는 말로 '쓴 맛을 보아야 한다'고 하는 것도 같은 의미 일 듯 하다.
다만 새겨 두어야 할 일은 쓴맛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 모든 경구들이 실패나 패배의 원인이나 책임이 스스로에게 있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반성하는데서 비롯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고도 진 것을 거부하는 협량(狹量)과는 거리가 멀다는 얘기다.
때마침 이 땅에서 월드컵이라는 세계적 축구경기와 지자체 선거라는 국내 정치 행사가 동시에 치러진다. 두 행사에서 모두 승자와 패자가 극명하게 갈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국내 행사에도 세계의 시선이 머물 것이다. 선거도 축구경기처럼 당당하게 치르고 설령 패하더라도 그 쓴맛을 다음 승리의 밑거름으로 삼는 성숙된 자세를 보였으면 한다.
신성순(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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