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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금 판결과 실명제 혼란(사설)

서울고법의 지난 16일 전직대통령 비자금사건 판결은 선진사회를 지향하는 시대상황과 관련해 상당한 문제와 혼란을 예고하고 있다. 차명거래에 대한 업무방해죄의 불인정과 뇌물공여에 대한 정상참작론에 대한 혼란이 그것이다.먼저 차명거래에 대한 무죄판결은 현정부의 최대 개혁치적으로 꼽히는 실명제의 본질을 훼손해 제도자체를 유명무실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 실명제는 모든 금융거래를 실명화해 투명한 사회를 만들자는 취지로 도입됐다. 그러나 예금자보호 원칙과 상충돼 합의차명의 경우 이를 규제할 법적장치가 없어 출발부터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래서 고육책으로 도입한 것이 업무방해죄였는데 이마저 무효화해 실명제는 사실상 도입이전 상황으로 후퇴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됐다. 실명제 이전에는 차명 또는 도명거래를 맘놓고 할 수 있었다. 실명제도입으로 달라진 것은 차명사실이 적발됐을 경우 법적제재를 당할 수 있는 여지를 뒀다는 점이었다. 이번 판결로 그같은 잠재적 위험마저 제거된 것이다. 실명제도입 3년째를 맞은 지금도 4조원규모의 가명계좌가 온존해 있고 실명제 적용을 받지 않는 예외적 금융소득 종합과세 상품이 잇따라 허용되고 있는 상황에서 나온 판결이어서 실명제퇴색에 대한 우려를 더욱 크게하고 있다. 정부는 실명제를 보완해 본래취지를 살리느냐 아니면 포기를 선언하느냐하는 중대한 갈림길에 서 있다고 할 것이다. 뇌물공여혐의에 대해 재판부는 이른바 「지하 수로론」을 들어 정치인들의 책임을 더 강조했다. 군사정부시절엔 멀쩡한 기업도 권력자에게 밉보이면 공중분해됐다. 그래서 재벌들이 생존을 위해 뇌물을 갖다바쳐야 했던 당시의 정상을 참작한 것이다. 뇌물관행이 그때로 끝나 지금은 없는 것이라면 이 판결은 납득될 수 있다. 그러나 그 관행은 연이어 터지는 고위공직자들의 비리행위에서 보듯이 현재진행형이며 앞으로도 그렇다고 봐야 한다. 법이 현실을 앞서가면 사회가 혼란해진다지만 뇌물관행과 같은 태고 이래의 범죄만큼은 그 수법이 날로 교묘해지고 있다는 점에서 법이 예방적 기능을 가져야 한다. 세계무역기구(WTO)가 부패라운드를 도입하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 사건 1심재판에서 전두환 피고인은 『기업인들이 가져온 돈을 돌려보냈더니 불안해서 밤잠을 못이루고 해외도피까지 생각한다는 얘기를 듣고 돈을 받기 시작했으며 그랬더니 기업인들이 열심히 투자하고 기업활동에 전념, 쓰러져가던 경제를 일으켜 세웠다』고 진술했다. 자기합리화를 위한 궤변으로 치부하더라도 뇌물관행이 단지 타의 때문이었느냐에 대해 기업인들의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실명제위반부분 무죄판결에 대해 검찰이 상고할 예정이라고 하므로 앞으로 대법원의 결정을 주목하면서, 뇌물공여혐의 기업인에 대한 감형도 현재의 어려운 경제여건을 감안한 것일진대 기업인들은 이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경제를 되살리는데 진력해주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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