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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일 나의 인생] (72)출판에 대한 무지와 편견
입력2003-09-28 00:00:00
수정
2003.09.28 00:00:00
박상영 기자
10여 년 전 평소 가까이 지내는 작가가 들려준 얘기이다. 경기도로부터 민방위 교육용 영화 시나리오를 위촉 받아 대본을 써 줬다고 했다. 회계과로 가면 원고료를 지불한다기에 찾아갔더니 `견적서`를 제출해 달라더라는 것이었다. 작가는 어리둥절해서 견적서를 어떻게 써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알아서 쓰라고만 하더란다.
그래서 `볼펜 몇 자루, 원고지 몇 장이라고 쓰면 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모른다면서 견적서가 없으면 원고료를 지불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더라는 것이다. 작가는 기가 막혀서 예금통장 번호만 적어서 던져 주고 나왔더니 두어 달 후 통장에 원고료가 입금됐더란다. 그리고 덧붙여서 말하기를 회계 담장자가 원고료 견적서를 어떻게 썼는지 지금도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라고 했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작가가 지어낸 얘기려니 했지만 지금은 그 말을 사실로 믿고 있다. IMF 한파가 시작되고 연일 대규모 서적 도매상들이 부도를 내서 출판계 전체가 전전긍긍하던 97년의 일이었다. 나는 언론과 인터뷰에서 정부가 우선 200억원만 지원해 주면 급한 불을 끌 수 있다고 했다. 사실 정부에 이미 지원 요청을 하고 하회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그러자 다음날 신문에는 출협이 정부에 200억원의 긴급 지원요청을 했고 정부가 이 요청을 들어주기로 했다는 식의 보도가 나갔다. 청와대에서는 즉각 왜 확정되지도 않은 사실을 확정된 것처럼 말했느냐고 항의전화가 왔다. 나는 그런 것이 아니라며 언론이 앞질러서 확정된 것처럼 보도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청와대에서는 출판은 중소기업 영역이니 중소기업청에서 검토하도록 연락을 취해 주겠다고 했다.
며칠 후 중소기업청에서 정부의 200억원 지원설과 관련하여 의논할 것이 있다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나는 문화관광부 담당 국장과 출판협동조합 이사장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과천 중소기업청을 찾아갔다. 중소기업청의 담당 국장은 우리와 마주앉자 첫 마디에 중소기업 회생 특례자금이 있는데 200억원 정도는 당장이라도 지원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이 얼마나 반갑고 고맙던지 출판계를 대신하여 몇 번이고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그리고 200억원을 지원한다면 어떤 방법으로 지원할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담당국장은 `담보만 제공하면 당장이라도 저리 융자가 가능하다` 는 것이었다.
“담보라니요? 출판사가 무엇을 담보로 해야 합니까?”
“기업 분류표를 보니까 출판사는 제조업에 속해 있던데 그렇지 않습니까. 제조업이면 공장 부지나 건물, 기계나 제조시설이 있을 테니까 그런 것으로 담보하면 됩니다.”
“제조업으로 등록은 하지만 실제 출판사에는 제조시설이 없습니다. 출판사는 기획이 주업무이지 인쇄나 제본은 출판사에 소속된 시설이 아닙니다.”
“곤란하게 됐군요. 담보가 없으면 우리로서도 지원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되어 첫번째 200억원 지원 문제는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나는 200억원 지원이 무산된 것도 안타까웠지만 중소기업청의 담당 국장이 출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더 큰 실망을 했다.
정부 고위 공무원들조차 출판이 무엇인지, 출판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고 있다면 잘못된 인식과 편견과 오해를 풀어주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한 일이었다. 그러고 보면 출판을 제조업으로 분류해서 산업재해 보험금을 의무적으로 내야 하는 일도, 출판과 인쇄가 엄연히 다른 업종임에도 불구하고 `출판인쇄진흥법`으로 한데 묶어 놓은 일도 결국은 출판에 대한 인식 부족과 편견과 오해에서 비롯된 결과일 것이다.
정책을 집행하는 사람들이 출판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면 출판발전을 위한 정책이나 지원도 바르게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아시아태평양출판협회장ㆍ예림 경기식물원이사장ㆍ전(전)대한출판문화협회장
<박상영기자 sane@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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