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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투자자 임광옥(33)씨는 지난 2013년부터 매해 평균 세번 정도 증권사 계좌를 바꿔가며 주식거래를 한다. 증권사들이 수시로 신규 가입 계좌 고객을 대상으로 브로커리지(주식 위탁매매) 수수료 무료 이벤트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지난해에는 키움증권에서 무료 서비스를 받았고 올해는 미래에셋증권으로 계좌를 갈아탔다. 임씨처럼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수수료 무료 이벤트를 벌이는 증권사나 수수료가 0.01% 이하로 낮은 증권사의 계좌를 통해 주식을 매매한다.
증권사들의 브로커리지 수익이 매년 급감하는 것은 주식투자 자체가 줄어드는 것도 있지만 증권사들 스스로 제 살 깎아먹기 경쟁이 연중 이어지는 탓도 크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증권업계에서는 몇 년 전부터 브로커리지 중심의 사업 모델은 끝났다는 말마저 나오고 있다. 시장 전문가들은 증권사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단순 주식거래 중개역할에서 벗어나 종합적으로 고객의 자산을 관리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자초하는 브로커리지 시대의 종언=증권사 브로커리지 수익이 급감하기 시작한 것은 2011년부터다. 코스피지수가 박스권에 갇혀 거래대금이 감소하는 상황에서 증권사들이 고객 점유율을 확대하기 위해 위탁매매 수수료를 잇따라 내리면서 오히려 수익성이 악화됐다. 실제 키움증권이나 이트레이딩증권의 홈트레이딩시스템(HTS)과 모바일 주식거래 수수료는 0.015%밖에 되지 않는다. 투자자가 키움증권 계좌를 통해 HTS로 100만원의 주식을 살 때 키움증권에 내야 하는 수수료는 150원에 불과한 것이다. 2005년 증권업계 평균 위탁 수수료가 0.5%였던 데 반해 현재는 0.1%에 불과하다. 10년 사이 위탁 수수료가 5분의1 수준으로 쪼그라든 셈이다.
증권사들이 고객 유치를 위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수수료 출혈경쟁에 나서면서 이 같은 상황은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증권사들이 위탁 수수료 인하 및 무료 이벤트를 진행하는 게 다반사이고 최근에는 선물·옵션 수수료 및 해외주식 거래 수수료 무료 행사까지 이어지고 있다. 올해 들어서도 미래에셋증권은 자사 스마트폰 주식거래 서비스로 주식을 거래하는 신규 고객에게 올 한해 동안 매매 수수료를 면제해주고 있다. LIG투자증권은 올해 말까지 제휴은행에서 계좌를 신규 개설한 고객에게 계좌 개설일로부터 주식은 3년, 선물·옵션은 12개월간 매매 수수료를 면제해준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증권맨들 사이에서 수수료 수입보다 인건비가 더 나온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며 "투자자들도 수수료를 내지 않고 거래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번 내린 수수료는 다시 올리기 어렵기 때문에 온라인 브로커리지 시장을 선점한 키움증권 등 몇몇 증권사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증권사의 위탁매매 수수료 수입은 계속 감소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수수료 출혈경쟁이 지속될 경우 브로커리지 기반 증권사 사업 모델은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박용린 자본시장연구원 금융연구실장은 "아직까지 브로커리지 수입이 증권사 수수료 수입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면서도 "매매 수수료가 전반적으로 하락하면서 위탁매매 부문의 위축은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자산관리 능력 극대화가 살길=위탁매매 수수료에 기반한 사업 모델 전망이 어두운 만큼 전문가들은 증권사들이 고객자산관리(WM) 사업을 키워야 한다고 지적한다. 저금리가 장기화됨에 따라 은행이나 보험사들이 내놓는 상품보다 수익률이 높은 증권사 상품에 대한 잠재수요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증권사들이 알아서 포트폴리오를 구성해 고객 자산을 관리해주는 일임형 랩어카운트 잔액은 지난해 11월 말 기준 74조3,312억원으로 3년 전의 48조8,523억원 대비 54.1% 늘어났다. 또 자산관리 분야는 브로커리지와 비교해 수수료가 높고 아직까지 수수료 인하 경쟁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차별화된 전략으로 고객 자산만 잘 관리해준다면 증권사의 주력 수익원으로 부상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 주요 증권사 랩어카운트 상품의 수수료는 1~3%에 이른다.
특히 '100세 시대'를 맞이해 노후 자산관리가 중요해지면서 증권사의 자산관리 사업 비중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금융당국도 퇴직연금의 위험자산 투자한도를 높이도록 하면서 증권사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최근 자본시장발전협의회 주최로 열린 '2015 금융투자인대회'에서 증권업계의 미래 비전으로 '국민 노후소득을 책임지는 자산관리자 되자'가 제시된 점도 자산관리 사업의 중요성을 방증한다. 주요 증권사 최고경영자(CEO)들도 올해 경영목표를 자산관리 강화로 잡고 있다.
다만 자산관리를 도약의 디딤돌로 만들려면 고객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증권사가 고객들에게 자신의 자산을 늘려줄 것이라는 믿음을 줘야 돈을 맡길 수 있기 때문이다. 2007년 인사이트펀드 손실, 2013년 '동양 사태'를 거치면서 증권사에 대한 투자자들의 신뢰도는 크게 떨어졌다. 주요 증권사 사장들이 올해 중점 사업 목표를 고객 신뢰 회복으로 정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금융당국은 파생상품 시장 규제 풀어야=일각에서는 금융당국이 고사 직전인 파생상품 시장에 대한 규제를 풀어야 증권사들이 살아날 수 있다고 지적한다. 한때 거래량 기준으로 국내 파생상품 시장은 세계 1위였지만 금융당국의 각종 규제로 위축돼 증권업계의 수익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금융당국은 2010년 11월11일에 발생한 '옵션 쇼크' 이후 코스피200 옵션 계약단위를 5배로 높였고 주식워런트증권(ELW) 호가를 제한했다. 파생 시장의 거래량이 급감했고 국내 증권사의 파생상품 시장 수탁 수수료는 2011년 5,730억원에서 지난해 9월 기준으로는 2,461억원으로 반토막이 났다. 설상가상으로 금융당국은 지난해 말부터 선물·옵션에 대한 개인고객 기본예탁금 기준을 높여 투자자 진입장벽도 높였다. 또 내년부터는 파생상품에 양도차익세(10%)도 도입할 예정이어서 증권사의 파생영업은 더욱 위축될 것으로 보인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내 선물·옵션 거래대금이 각종 규제 여파로 2011년 고점 대비 50% 이하 수준으로 떨어졌다"며 "파생 시장이 살아나야 현물 시장도 살아나고 증권사들은 다양한 구조의 상품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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