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시장에서 존폐 위기에 몰린 토종 브랜드들이 '큰손' 왕 서방(중국인 소비자) 덕분에 되살아나고 있다.
9일 업계에 따르면 코리아나·참존 등 화장품 기업은 물론 한방샴푸 브랜드 댕기머리, 법정관리 중인 패션기업 EFC의 잡화 브랜드 소노비 등이 면세점 또는 유커(중국인관광객) 관광지역 내 매장을 중심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롯데면세점의 올해 1월부터 9월까지 매출 집계에 따르면 참존·댕기머리·소노비·김정문알로에(로라엔느) 매출의 80∼90%가 중국인 소비자로 나타났다. 해외여행 지출 2년 연속 세계 1위를 기록한 왕 서방의 큰 씀씀이가 국내 소비자로부터 외면 받는 '죽은' 국산 브랜드에 숨을 불어넣고 있는 격이다. 이에 따라 국내 시장에서 전성기 때만큼의 성장동력을 잃어버린 이들 기업들은 중국인 특화제품을 개발하는 등 초점을 왕 서방으로 돌려 회생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다.
1990년대를 주름 잡았던 코리아나화장품은 2000년대 저가 화장품과 고가 화장품으로 양분된 시장 트렌드를 제때 좇지 못하며 시장 지배력을 잃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코리아나는 '차이나 드라이브'를 걸며 부진 탈출을 꾀하고 있다. 현재 300여개의 멀티브랜드숍 '세니떼'를 운영 중인데 세니떼 서울 명동·이대점의 경우 고객의 80%가 중국인일 정도로 왕 서방이 매출을 견인하고 있다. 코리아나 측은 "지난 5월 출시된 골드 색상 리프팅 크림의 경우 초도 4,000개 물량이 조기 완판됐다"며 "금을 선호하는 중국인들의 기호와 맞아떨어져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 왕 서방의 위력을 몸소 체득한 코리아나는 지난달 중국 톈진법인 공장 신축을 위해 80억원을 차입, 중국 현지에 공장을 운영하면서 화장품 제조자개발생산(ODM) 및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사업을 확대할 계획이다.
올해 창립 30주년을 맞는 토종 화장품 브랜드 참존도 왕 서방의 구매력 덕에 매출성장에 탄력을 받았다. '샘플만 써봐도 알아요'라는 광고문구로 인기를 끌며 1990년대 말까지 화장품 업계 2·3위를 유지했던 참존은 2000년대 미샤·더페이스샵 등 브랜드숍이 화장품 가두시장을 장악하면서 힘을 잃었다. 참존은 고공행진 중인 중국 내 매출과 중국 소비자의 뜨거운 반응을 발판 삼아 예전의 명성을 되찾겠다는 각오다. 참존은 2013년부터 중국 주요 4대 항공사에 국내 브랜드로는 최다인 8개 품목이 기내 면세품으로 입점돼 있다. 2009년 제주 롯데면세점 입점 이후 지난해 5개 롯데면세점에 추가로 들어갔다. 왕 서방의 구미를 당기는 제품은 '참인셀' 라인으로 에센스·크림 등의 가격이 최저 12만원에서 최고 40만원에 이르는 고가임에도 중국인들 장바구니에 가득 담긴다고 회사 측은 전했다. 그 결과 올 들어 롯데면세점 내 참존의 매출은 전년 대비 28% 증가했고 중국 법인 매출비율도 2011년 19%, 2012년 21%, 2013년 32%로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국내 최초 한방샴푸 브랜드인 두리화장품의 댕기머리도 중국 마니아층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 한방샴푸 붐으로 아모레퍼시픽·LG생활건강 등 대기업들이 잇따라 관련 제품을 내놓고 대대적인 마케팅을 펼치며 한방 헤어케어 시장에 뛰어들자 댕기머리는 '국내 최초'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빠르게 국내 소비자의 뇌리에서 잊혀 졌다. 하지만 요즘 충성도 높은 중국인 소비자 덕분에 성장엔진을 다시 가동 중이다. 두리화장품 측은 중국 소비자 특화제품으로 '육발'이라는 이름의 한방샴푸를 따로 만들어 내놓는 등 왕 서방 마케팅에 사활을 걸고 있다.
현재 법정관리 중인 패션기업 EFC의 소노비도 왕 서방이 브랜드에 생명을 불어넣은 사례다. 현재 국내 8개 면세점을 비롯해 중국 선전·베이징 등지에 오프라인 매장 3곳을 운영하며 세를 키워가고 있다. 특히 중국 소비자를 위한 면세점 단독제품을 출시하며 브랜드 성장에 속도가 붙었다. 체구가 작은 중국 소비자를 겨냥해 백팩 '런던맵' 스몰 사이즈를 추가 제작해 면세점 단독상품으로 내놓았고 붉은색을 선호하는 왕 서방을 타깃으로 소노비 베스트 상품에 붉은 색상을 접목한 '까페드소노비' 제품을 면세점에서만 별도 판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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