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한차례의 통과의례는 불가피하다.”(한국은행의 한 관계자) 한은이 외환보유액의 수익률이나 통화별 자산 비중 등을 정기적으로 공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이유는 “2,400억여달러나 되는 외화보유액을 쌓아놓기만 하고 수익률도 낮다”는 정치권이나 감사원 등 외부의 비판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뜻이다. 또 투자 내용을 일부 공개하면 외환시장의 투명성을 높이고 투자상품 다변화 및 투자기법 선진화를 통해 수익성을 제고할 수 있다는 게 한은의 시각이다. 한은은 특히 외환보유액의 통화 비중을 일부 다변화했더라도 그 폭이 작고 과거 투자 내역을 밝히는 차원이어서 외환시장에 미치는 충격도 적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한은이 관련 포트폴리오를 밝히면 시장 참가자들의 ‘쏠림 현상’이 나타나고 외환정책의 효과가 떨어진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어 논란이 예상된다. 더구나 첫 공개 때는 국제 금융시장의 충격도 어느 정도 불가피할 것이라는 의견도 많다. ◇한은 “정치권 비판 정면돌파” 의지=지난해 10월23일 한은 본관에서 열린 국감장. 한은은 이날 외환보유액의 적정 규모나 운용 손실 등에 대해 몰매를 맞았다. 한은은 이 같은 지적에 “외화자산의 운용수익률을 밝힐 수 없다”면서도 억울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한은은 지난달 22일 보도 해명 자료를 통해 “외화자산 투자수익률이 연 4∼5%에 불과하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며 최근 수년간 운용수익률 평균도 수익률을 공개하고 있는 일부 다른 중앙은행에 비해 높은 수준”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한은으로서는 투자수익률을 공개하면 소모적인 비판에서 비켜갈 수 있다는 얘기다. 지난해 출범한 한국투자공사(KIC)를 의식한 측면도 있다. KIC는 매년 결산 후 2개월 내 수익률, 투자 대상 등을 정기적으로 공개하도록 돼 있고 분기별 공개도 검토 중이다. 한은 관계자는 “내년에 KIC가 투자 내용을 공개하면 정치권이나 감사원 등의 압력도 더 커질 것”이라며 “더 높은 수익률을 낼 자신감도 있는데 미리 수익률을 공개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고 말했다. ◇수익성 제고 효과도 기대=무엇보다 외환보유액의 운용에 대해 공세적인 자세를 재확인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외환보유액의 특성상 금융위기 등에 대비해 안정성과 유동성을 최우선에 두고 운용하겠지만 자산가치 보전을 위해 수익성 제고에도 노력하고 사후에 이를 검증받겠다는 것. 한은은 지난 2월8일 외환보유액의 일부를 해외투자은행(IB)을 통해 선진국 우량주식에 운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 실제 다른 나라 중앙은행들도 기존의 ‘안전 투자’에서 공격적인 투자 성향을 보이고 있다. 기존의 싱가포르나 노르웨이는 물론 중국ㆍ러시아ㆍ멕시코 등도 외환보유액이 적정선을 넘어서면서 자산 및 통화를 다변화하는 등 수익을 찾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다. 현재 외환보유액 수익률을 공개하고 있는 곳은 노르웨이ㆍ이스라엘ㆍ영국 등의 정도다. 이 가운데 한은은 노르웨이중앙은행 내 설립된 NBIM을 집중 연구 중이다. NBIM은 노르웨이 정부연기금, 외환보유액, 정부 석유보험기금 등에서 나온 2,500억달러를 40% 정도인 주식 비중을 지속적으로 늘리는 한편 운용 내역을 정기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외환시장 충격에는 의견 엇갈려=일단 이 같은 한은의 방침에 대해 투명성 및 수익성 등의 측면에서 긍정적인 의견이 우세한 편이다. 김재은 SK증권 이코노미스트는 “외환위기 같은 유동성 위기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도 한은이 안정성만 중시해 외환보유액 운용의 효율성이 떨어졌다”며 “외환시장의 자율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외환보유액 수익률 등에 대한 공개가 정례화하면 시장 충격도 거의 없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규복 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한은이 향후 투자 방침을 밝히면 충격이 크겠지만 과거 투자 내역을 밝히는 데 그치는데다 통화 및 자산 다변화의 폭도 크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통화별 자산 구성 등이 처음으로 공개되면 외환시장에 적지않은 충격이 예상된다. 김현욱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우리나라 외환시장 규모는 외환보유액에 비해 작은 편”이라며 “가장 큰손인 중앙은행의 자산구조가 드러나면 시장에서 쏠림 현상이 나타날 수 있는데 굳이 다른 나라가 하지 않는 정책을 펼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김 애널리스트도 “외환보유액의 수익성 추구나 다변화는 전세계적인 추세이기 때문에 펀더멘털 측면에서 충격은 없을 것”이라면서도 “첫 공개 때는 아무래도 시장이 요동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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