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ㆍ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 논의대상에서 자동차 산업을 제외해야 한다”는 유럽의회의의 권고는 실제 자동차산업의 배제보다는 우리 측의 더욱 큰 양보를 얻어내기 위한 ‘으름장’ 성격이 강하다. 또 여기에는 글로벌 자동차시장의 표준을 장악하려는 유럽과 미국의 치열한 경쟁이 자리잡고 있다. 각각 한국과의 FTA를 자신들의 표준 확대의 계기로 삼으려는 전략이라는 것이다. 이미 지난 19~23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제5차 협상에서 한미 FTA 당시 미국에 내줬던 양보와 똑같은 수준을 제시했지만 EU 측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자동차 기술표준 문제로 이미 많은 시간을 허비한 우리 정부가 협상 타결을 위해 더 큰 선물을 줘야 할지 아니면 더 이상 끌려가지 않고 공세적 입장으로 전략을 수정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EU, 왜 기술표준에 집착하나=자동차 기술표준 문제는 EU가 온실가스 등 환경문제와 함께 EU 표준을 세계의 표준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지난 수 년간 사활을 걸고 뛰고 있는 초민감 분야이다. 자동차 기술표준은 전조등과 같은 자동차 부품 규격, 안전벨트 등 안전 규격을 표준화하는 것. 기술표준이 서로 다를 경우 별도 생산라인을 구축해야 하는 등 자동차 제조업체들의 부담이 크게 늘어난다. 현재 자동차 기술표준의 양대 축은 미국과 유럽으로 당연히 유럽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유럽 표준이 글로벌 스탠더드로 정착돼야 해외 수출전략에 차질이 없다. 이 같은 업계의 이해관계와 EU집행위의 지속 가능한 규제전략이 맞아떨어지면서 집행위는 2005년부터 ‘카21(CAR21)’ 프로그램을 추진하고 있다. ‘21세기를 위한 경쟁력 있는 유럽 자동차 규제시스템(Competitive Automotive Regulation system for the 21st century)’의 약어인 이 프로그램에 최적의 규제정책을 펼칠 것을 주문한 유럽의회 보고서가 바로 한ㆍEU FTA에 대한 강경 발언을 담은 문제의 ‘CAR21 프레임워크 보고서 초안(Draft Report on CAR21)’인 것이다. EU집행위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활동 중인 박대영 변호사(영국)는 “카21이 이미 수년 전부터 유럽 내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기술표준ㆍ환경문제 등을 논의해왔지만 한ㆍEU FTA까지 언급하며 이런 식의 메시지를 전달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특히 “27개 EU 회원국의 투표를 통해 채택이 승인된 것인 만큼 한국 협상단에 상당한 부담이 될 것”이라며 “유럽의회가 이 초안을 업데이트해 최종보고서를 조만간 내놓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번 보고서를 직접 작성한 유럽의회 산업위원회(ITRE) 소속 요르고 카치마르카키스 의원(독일 자민당)은 22일 보고서가 의회를 통과하자마자 독일 자민당 명의로 배포된 보도자료를 통해 “EU는 한국과 같은 제3세계와의 통상관계에서 더 이상 자동차 제조업 분야의 일방적인 특혜를 용인해서는 안 된다”며 잇달아 EU집행위에 보다 강경한 대응을 촉구했다. ◇한국, 기술표준 결단 내려야 할 듯=이번 보고서 초안 내용에 정부는 사실관계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FTA 협상에 관여하고 있는 실무자들은 “EU집행위에 의견을 권고하는 수준”“보고서가 지적한 보조(aid) 문제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는 내용들에 대해 ”. 국내 자동차 업계도 이번 보고서에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다며 발끈한 상태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보조 문제는 정부가 우리 업계와 연계된 연구개발(R&D), 세제 등 시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며 “이렇게 추상적인 문제를 한ㆍEU 협상과 연계시켰다는 건 그 전략적 의도를 인정하더라도 내용상 저급한 수준의 보고서라는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내용의 사실관계를 떠나 이번 보고서를 통해 유럽의회까지 나서서 한국 측을 압박하고 있는 만큼 내년 1월21일께 서울에서 EU와 제6차 협상을 벌여야 하는 우리측 협상단의 치밀한 대응이 요구되고 있다. 이와 관련, 우리측 협상단은 최근 막을 내린 5차 협상에서 유럽 제조업체에 대해 업체별로 한국 내 연간 판매량이 6,500대 이하인 경우 한국의 기술표준 적용을 면제해주고 6,500대가 넘더라도 5년간 적용을 유예할 수 있다는 안을 제시했다. 한미 FTA와 동일한 수준의 제안이다. 그러나 EU 측은 “EU가 한국에 수출하는 자동차가 미국보다 월등히 많다”며 일언지하에 거절, 우리측 협상단의 기대를 크게 꺾어놓았다. 협정 무산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하기 위해 결국 2개월 내 추가적인 양보안을 내야 하는 정부가 한미 FTA 수준 이상의 양보안을 내놓을 때 제기될 미국 측의 반발 가능성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서 정부의 고민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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