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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는 관·나는 정… 퇴행하는 금융산업] <상> 은행원 30년… 어느 부행장의 한숨

'코드금융'에 묶인 손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관피아·정피아 요직 포진… 시장논리 없는 정책 쏟아내

금융산업 효율 갉아먹어

"골든타임 얼마 안남아 정·관 그림자 걷어내야

"창의적 사고·실천 가능"


우리나라 금융산업이 고장 났다. 선진금융을 위한 전진은 고사하고 역행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금융업이 일자리, 부가가치 창출을 못함은 물론 세금도 못 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는 숲만 보고 나무는 보지 못했거나 애써 외면해 나온 평가라는 지적이다. 문제의 본질은 따로 있다. 금융산업의 고질적인 병폐였던 '관피아'도 모자라 정치권에서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정피아'까지 요직에 포진해 온갖 훈수를 두고 있다. 여기에 시장 확대와 수익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과 상품까지 정부 정책에 코드를 맞춰야 하는 기현상까지 나타났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금융업으로 잔뼈가 굵은 인사들의 자조와 푸념 속에 금융산업의 미래가 암울해 보인다.

서울경제신문은 '뛰는 관(官)·나는 정(政)…퇴행하는 금융산업' 기획 시리즈를 3회에 걸쳐 게재한다. 이를 통해 한국 금융의 민낯을 다시 한 번 드러내고 제자리를 찾아 정진할 수는 길이 무엇인지 모색해본다./편집자주

"우리나라 금융산업, 퇴행하고 있습니다. 모든 금융사 손발이 묶여 있지 않습니까. 인사와 정책·상품까지 내부의 판단과 전략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은행밥 30년이라는 시중은행의 한 부행장은 이렇게 말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마디 한마디에 절박함과 답답함이 서려 있었다. 그는 "정치권에서 금융지주사에 없는 사장직을 만들어 그 자리에 전 국회의원을 보내려는 추태와 정권 창출에 기여했던 정피아 인사들을 무더기로 은행 사외이사로 앉히는 모습을 보면서 은행산업이 이제 자율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구나 생각했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어 "외부에서 내려온 인사들, 예전에는 애국심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없이 보은과 차기 행보에만 관심이 있다"며 "은행밥을 먹는 동안 이런 무개념한 상황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부행장은 "퇴행하는 한국금융을 바로잡을 골든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모든 것을 쥐고 흔들려는 정치권과 관료 집단의 간섭을 뿌리 뽑아 은행을 시장에 돌려줘야 하지 않겠느냐"고 강조했다.

◇"정·관 추천 인사 주주와 조직 위해 일 못해"=부행장이 지적한 우리나라 금융산업이 내부의 전문가와 시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가장 큰 걸림돌인 정치권의 낙하산 인사를 정치권에서도 비판하고 나섰다. 박병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최근 "최근 금융권에 제기되는 정치적 외압의 공통 요소는 서강금융인회, 새누리당 대선캠프 출신, 친박 인사 등 세 가지 공통분모"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최근 선임된 은행 사외이사 또는 금융기관 수장의 면면은 한결같다. 대선 캠프 출신의 금융연구원장 선임에 이어 KB금융 내분 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인사가 두어 달 만에 계열사 사장으로 컴백했다. 그는 서금회 인사로 분류된다. 우리은행 사외이사 선임은 더욱 노골적이었다. 새누리당 비례대표 후보와 이 당 소속인 청주시장의 부인, 17대 대통령선거대책위원회 부위원장 출신 등 말 그대로 순수한 정피아 세 명이 선발됐다. KB국민은행 사외이사 역시 정피아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번에 선임된 사외이사 4명 중 2명이 새누리당과 인연이 있거나 정권 실세와 학연으로 얽혀 있다.

낙하산의 문제는 명백하다. 낙하산 인사는 주주·조직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없다는 이유다. 자신을 도와준 이해관계자나 개인의 영달이 우선이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정치권에서 추천됐는지 아니면 소액주주를 통해 선임됐는지에 따라 사외이사들의 행동방식이 완전히 달라진다"며 "감독 당국과의 교감하에 내려오는 인사는 회사와 주주의 이익에 대해 충실할 수 없다"고 전했다.

◇코드 금융…시장 논리 없는 정책·상품 쏟아져=인사뿐만 아니라 '코드금융'으로 불리는 정책과 상품도 국내 금융산업의 효율성을 저해하고 있다. 대표적인 정책이 기술금융이다. 중소기업에 기술신용평가기관의 평가서를 기반으로 대출해준 실적이 지난 2월 말 현재 2만1,373건, 13조5,033억원으로 집계됐다. 기술금융 대출이 시작된 지난해 7월 1,922억원(486건)에 비하며 70배가 넘게 폭증한 것이다.

선거철만 되면 선심 쓰듯 내놓는 정책도 문제다. 대표적인 사례가 카드 가맹점수수료다. 201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중소가맹점에 대한 우대수수료율(1.5%)을 적용했으며 이듬해 6월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우대수수료율 적용 중소가맹점의 범위를 확대(연매출 2억원→3억원)하기도 했다. 자동차보험료 인상 문제도 마찬가지다. 감독 당국과의 교감 없이 사실상 인상은 불가다. 시장 논리가 통용되지 않는 셈이다. 자전거보험·장애인연금보험 등 정책보험 상품과 예·적금 가입으로 통일사업에 기부하는 통일금융 상품 등은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철학 없이 만들어지는 정책 상품의 대표적인 예다.

금융권의 한 고위관계자는 "해외 진출로 금융산업의 활로를 모색하라는 지적을 많이 하지만 정작 국내 금융기관은 코드금융에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손발이 묶여 있다"며 "국내 금융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정·관의 그림자를 걷어내는 것이 우선이고 그때 비로소 금융산업이 창의적인 사고와 실천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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