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안으로 특정효소 식별 가능… 샘플 따로 채취하는 불편 없애
독성 검증도 한번에 해결
약물 반응 따라 색상 달리해 각각의 약효 필터링까지
출근시간에 인산인해를 이루기로 악명 높은 지하철 2호선 신도림역. 수많은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빨간 옷을 입은 사람만 체크한다면 우리 눈은 얼마나 정확히 셀 수 있을까. 아마 오랜 시간 들여다봐도 완벽히 짚어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방법을 달리해 빨간 옷을 모두 형광으로 바꾼 뒤 지하철역의 빛을 모두 없애보면 어떨까. 이 경우 우리 눈은 첫 번째 경우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고 빠르게 사람들을 셀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형광빛의 마술이다.
7월 과학기술자상 수상자로 선정된 박승범 서울대 화학부 교수는 이렇게 우리 생활에 획기적으로 쓰일 수 있는 독보적 유기 형광물질을 만들어낸 빛의 마법사다. 세계 최초로 모든 색상을 구현할 수 있는 하나의 분자구조를 확립해 유기 형광물질을 합성, 스스로 '서울플로어(Seoul-Fluor)'로 명명했다. 지난 2008년 이 구조를 처음 발견한 뒤 5개 이상의 특허와 10편의 논문을 작성했다. 이를 통해 박 교수가 합성해낸 서울플로어만도 벌써 140여종이 넘는다.
박 교수는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형광물질 연구의 역사는 벌써 100년이 훌쩍 넘었지만 기존 연구는 한 가지 구조로 하나의 색상만 구현할 수 있어 왜 그 색이 나오는지 이유를 알기도 어려웠고 원하는 색의 형광물질을 얻기 위해 수백 개의 형광물질을 합성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며 "하지만 우리의 분자구조를 활용하면 빛의 파장과 밝기를 처음부터 설계ㆍ예측ㆍ조절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그의 연구는 특히 각종 신약개발 기간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그가 개발한 기술은 신약 제조시 효능을 검증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이미 세포 내 산ㆍ알칼리 수치 차이를 감지하는 센서나 지방 방울에서만 선택적으로 빛을 발하는 센서, 활성산소를 검출하는 센서 등을 개발한 상태다.
원리는 이렇다. 세포 내 특정 효소의 기능이 저하되면 사실상 세포 안에서는 이를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렵다. 세포 내 수많은 효소 가운데 어떤 효소에 문제가 생겼는지 직관적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현 신약개발 과정에서는 일반적으로 일부 효소 샘플만 추출해 약물을 투여하는 방식을 쓴다.
하지만 형광물질을 사용할 경우 신도림역의 형광옷처럼 문제가 되는 효소들을 세포 내에서도 육안으로 직접 관찰할 수 있게 돼 처음부터 생명체에 직접 약물을 투입해도 된다. 세포에 약물을 바로 투입해 시험하면 효소 샘플을 따로 채취해 검사하는 불편과 부정확함이 사라짐은 물론 약물의 독성 검증까지 한번에 해결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다양한 색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에 약물 반응에 따라 색상을 달리해 각각의 약효를 필터링할 수도 있다. 알츠하이머병·파킨슨병 등 여러 난치병 치료제 개발도 예상보다 더욱 앞당겨질 수 있는 이유다.
서울플로어는 TV·조명 등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제품의 색감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 데도 쓰일 것으로 전망된다. 박 교수의 연구실적이 알려지면서 벌써부터 국내외 여러 제약ㆍ바이오 회사들이 이에 관심을 갖거나 테스트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 교수는 국내 화학생물학계에서 사실상 1세대 연구자다. 화학생물학이라는 분야는 지금은 명실상부한 화학연구의 중심축 가운데 하나지만 박 교수가 박사과정 전공으로 택할 때만 해도 국내에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연구 분야였다. 그는 한우물만 파야 한다는 주변의 만류에도 유기합성을 넘어 물질을 만드는 데까지 나아가고 싶다는 학자적 뚝심으로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지금은 화학과 생물학을 융합한 학문의 대가로 남았다.
박 교수는 "당시에는 불로 뛰어드는 불나방 같은 기분이었지만 이제는 화학생물학이 화학 분야의 엄청난 주류가 되면서 당시 결정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고 회상했다. 그렇다면 그의 꿈은 무엇일까. " 철없던 제자가 제대로 된 과학자로 성장한 모습을 확인할 때 그야말로 온몸에 전율을 느낀다"며 "더 중요한 꿈은 과학자로서나 가장으로서 딸이 존경하는 아버지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