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시장은 보험사와 증권사가 집중했던 분야다. 미래에셋증권이 지난 2005년 금융계 처음으로 '퇴직연금연구소'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해 삼성생명 '은퇴연구소', 우리투자증권 '100세 시대 연구소' 등이 설립되면서 증권ㆍ보험사는 은퇴시장 공략에 공을 들여왔다. 더욱이 은행이 은퇴시장에 관심을 덜 기울이면서 경쟁은 증권사 간 혹은 보험사 간의 싸움으로 국한됐다.
하지만 올 들어 상황이 확 달라졌다. 은행들이 이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이다. '은퇴연구소'나 관련 팀을 만든 것을 비롯해 사업부나 PB센터·금융연구소 등을 통해 은퇴 연구와 서비스 강화에 나섰다. 전방위적이라 할 만하다.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 출생)의 본격적인 은퇴가 시작되자 은행도 더 이상 앞으로의 먹거리가 될 시장을 놓치지 않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시중은행의 한 부행장은 "당장 베이비부머 고객의 은퇴 후 노후설계를 시작으로 고령화에 대비한 다양한 금융상품 개발을 진행해 시장을 잠식해나갈 것"이라면서 "금융지주를 중심으로 해 잘 짜여진 네트워크와 지점망, 자금운용 '안정성' 등의 강점이 있어 후발주자이지만 경쟁에서 자신한다"고 말했다.
◇은퇴시장 얼마나 되길래=통계청에 따르면 베이비붐 세대는 712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15%다. 앞으로 3년간 50대 이상 퇴직자는 150만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고 점차 이들의 은퇴가 늘면서 은퇴시장의 빠른 팽창은 불가피하다.
삼성생명은 퇴직연금과 개인연금을 합친 현재의 국내 은퇴시장 규모를 200조원으로 본다. 오는 2020년에는 개인연금 500조원, 퇴직연금 180조원 등 680조원으로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여기에다 취미·가족관계 등 비재무적인 활동까지 포함하면 은퇴시장 혹은 은퇴자산은 더욱 크다. 예컨대 미래에셋퇴직연금 연구소의 분석은 삼성생명이 추정한 규모보다 3배가량 많다. 국민연금까지 포함해 나타난 결과인데 미래에셋퇴직연금 연구소에 따르면 은퇴 총 자산 규모는 2012년에만 841조원에 이른다. 2020년에는 1,920조원으로 두 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추정치대로라면 은퇴자산은 전체 가계금융자산의 54%, 국내총생산(GDP) 규모 대비 108%에 달한다. 은퇴자산은 국민연금, 퇴직연금, 개인연금, 주택연금, 기타 금융자산(은퇴자산 활용 가능 자산)을 모두 합한 금액이다. 이 가운데 국민연금은 전체 은퇴자산의 47%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어 개인연금(23%), 기타 금융자산(14%), 퇴직연금(12%), 주택연금(4%)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시작된 은행권의 '은퇴시장' 뺏기=은퇴시장이 급속도로 팽창한데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가 시작되자 '금융계의 맏형'인 은행권도 경쟁적으로 은퇴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연구소를 설립하거나 관련 팀 신설을 시작으로 해 시장을 장악하겠다는 것이다.
하나은행은 올해 1월 은퇴설계팀을 리테일사업부 내에 신설하는 등 은퇴시장 공략에 가장 적극적이다. 은퇴설계 시스템도 만들었다. 상반기에는 은퇴설계마스터제도를 시행, 연간 100명의 은퇴설계 전문가를 선발할 복안도 세우고 있다. 신한은행은 지난 1월 4명으로 구성된 은퇴연구팀을 신설해 공략에 나섰다. 은퇴 전부터 고객과 미래를 함께 준비하자는 취지에서 팀을 신설했다는 설명이다. 팀 신설 이후 1일에는 은퇴 준비 전략을 담은 '골든에이지(Golden Age)를 위한 고객가이드북'을 발간했다. 전자책 형태로 발간된 가이드북은 총 3권으로 구성돼 있으며 은퇴 준비의 필요성과 문제점, 은퇴설계 방법, 개인별 맞춤 은퇴 전략을 설명하고 있다. 농협은행도 지난달 초 퇴직연금 고객에 대한 특화된 은퇴설계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NH은퇴연구소'를 신설했다. NH은퇴연구소는 앞으로 '행복채움 NH퇴직연금 포럼(가칭)'을 운영, 사업 활성화 방안을 모색하고 은퇴설계 관련 연구과제를 발굴한다는 전략이다. KB국민은행 역시 자산관리(WM)본부 산하에 운영 중인 은퇴설계 TF를 은퇴설계팀으로 바꿔 본격적인 업무에 나설 예정이다. 상반기에는 KB금융 경영연구소 안에 가칭 '은퇴연구소'도 설립하기로 했다. 이와 함께 우리금융은 은행보다는 우리투자증권의 '100세 시대 연구소'를 통해 은퇴시장 공략을 이어가겠다는 전략이다.
◇수성 나선 증권ㆍ보험사=은퇴시장을 겨냥한 은행권의 행보가 본격화되자 증권ㆍ보험의 수성 움직임도 만만치 않다. 경쟁력이 있는 상품을 출시, 되레 은행권의 자금을 뺏어오겠다는 결의도 내비치고 있다.
실제 증권사들은 은행의 자금을 끌어오는 것을 1차 목표로 은퇴준비 층을 타깃으로 해 잇따라 자산관리 상품을 내놓고 있다. 우리투자증권과 삼성증권ㆍ대우증권을 비롯한 대형 증권사들은 자산관리 상품의 경쟁력을 강화해 상품을 출시했다. 증권사의 한 관계자는 "증권사가 잇따라 자산관리 상품을 내놓고 있는데 이는 증권사 간의 고객유치 경쟁이라기보다는 은행과 증권업계의 싸움이 시작된 것으로 보면 된다"고 말했다. 다만 은퇴자금 운용이 '안정성'에 무게가 실려야 한다는 이유에서인지 아직까지 '은행→증권'으로의 자금 이동이 눈에 띄게 증가하지는 않고 있다. 이석훈 자본시장연구원 금융투자산업실장은 "과거보다 증권사 금융상품 투자에 대한 인식이 높아진 것은 맞지만 증권사로의 자금이동이 기존의 수신 규모를 위협할 정도는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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