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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들이 더욱 노력해 정치 경제등 모든 분야에서 중국과 일본을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샌드위치가 됩니다. 잘해야 합니다" 한국 광복군 동지회 석근영(84) 명예회장은 광복 60돌을 앞두고 찾은 기자에게 국민 모두가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할 시기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중국이 급속히 강해지고 있고 일본의 기세도 여전한 마당에 우리가 이 같은 상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또 다시 고난의 세월을 보낼 것이라고 우려했다. 석 명예회장은 땅에 떨어진 한국인의 인권을 바로잡기 위해 인권변호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일본 추오(中央)대 3학년에 재학중이던 지난 1943년12월 일본이 내린 징집명령을 받아 입대했지만 5개월만에 이탈해 광복군에 들어가 군사활동을 펼쳐온 독립지사. 석회장은 44년 5월25일 중국 쉬저우(徐州)의 일본군 중지(中支) 파견군에서 탈영할 당시 비로 불어난 화이허(淮江) 강을 총탄을 피해 가까스로 헤엄쳐 건넌 후 6일동안 물로 버티며 낮에는 숨어지내며 밤에만 걸어서 국민당소속 군에 합류했다. 석회장은 중국 린촨(臨泉)에 주둔한 국민당의 중앙군에서 장준하선생, 김준엽 전 고려대총장 등 33명의 조선 학병 탈출자들과 함께 굶주림 속에서 광복군 참여를 위한 5개월의 군사훈련을 마쳤다. 45년1월 충칭(重慶)에 도착해서는 임시정부 선전부에서 활동 했다. 4월부터 8월까지는 미국의 OSS(CIA의 전신)와 한국임시정부 공동으로 추진한 '독수리 계획(Eagle Project)'에 자원, 한국 상륙 특수공작원 교육을 받았다. 훈련을 마친 후 미국 책임자인 도노만 소장과 김구 임시정부 주석이 방문해 졸업을 축하하고 침투를 위한 협약까지 마쳤다. 그러나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해방돼 안타깝게도 전공을 올릴 기회를 놓쳤다. 광복후 개인자격으로 귀국한 그는 농림부와 내무부, 산림청 등에서 30여년간 공직생활을 했지만 친일파들의 득세속에 밀려 결국, 자영업자의 길을 밟기도 했다. "부동산투기, 님비현상들, 군수를 때리고… 사회 각부분에서 모두 제 잇속만 챙기려하고… 자기 이익도 중요하지만 나라가 잘 돼야 사회가 잘 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는 개인주의에 물들어 가는 세태에 대해 안타까워 했다. 석 명예회장은 광복 60돌을 맞아 과제로 부상하고 있는 통일에 대해서도 한마디 거들었다. "통일되면 당분간 경제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못살아도 통일은 돼야 합니다. 통일해서 노력하고 노력해서 잘 살게 만들고 일류 국가로 만들어야 합니다. '석동지 내 몫까지 해줘. 조선독립 만세'. 총에 맞은 동지가 죽음 앞에서 내게 던진 말이 생생하게 기억 납니다. 그 정신 반만 따라가면 통일 되도 넉넉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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