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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중소기업 현장 목소리] <1>저승사자보다 무서운 '납품단가 인하'

대기업들 '구두 발주' 후 단가 깎기 일쑤<br>"서면계약 요구=거래 포기" 간주 말도 못꺼내<br>'분기마다 인하요구→적자 →사업포기' 악순환


중소기업 경영의 가장 큰 애로중의 하나는 지나친 대기업의 납품 단가 인하다. 한국 경제발전의 산파역인 서울디지털산업단지(옛 구로공단)도 원자재, 환율 등 제반요건을 무시한 단가요구에 신음하고 있다

전자파차폐 제품을 생산하는 A기업은 지난해 12월 초 납품 대기업으로부터 올해 공급 물량에 대한 입찰에 참가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A사는 기존 납품단가보다 15% 싼 가격에 공급하기로 약속 했다. 이 회사 B사장은 "15% 인상을 해도 시원찮은데 오히려 15%가 깎였다"면서도 "원래 그런 거 아니냐"는 반응을 보였다. 이전부터 항상 그래 왔기 때문이다. 그가 전해준 납품단가 얘기는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충격적이다. 하지만 납품을 하는 중소기업들에게는 매번 있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B사장은 지난해 말에 정해진 가격이 올 1년 동안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고 알려줬다. 1년에 한번 입찰이 있고 나면 이후 분기에 한번씩 전화 등으로 단가 인하를 요구 받는다. 이 때 요구받는 인하율은 10~20% 수준이다. 대개 그렇게는 못한다고 해 협상을 벌여 10% 이하로 깎인 단가를 새로 적용 받는다. 이렇게 1년에 4번 정도 단가가 깎이고 나면 연말의 단가는 연초에 비해 20~30% 정도 낮아져있다. 납품단가 문제는 국내 중소기업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경영 애로 요인이다. 중소기업청이건 중소기업중앙회건 어디서나 설문조사를 하면 대부분의 중소기업이 선택하는 첫번째 문제가 납품단가 인하 요구다. 건설공사에 가장 많이 쓰이는 철근의 경우 지난 2006년만 해도 납품단가가 톤당 7만원이었 것이 지난해에는 2만9,000원까지 내려갔다. 유제철 철근가공협동조합 이사장은 "철근업체들은 현재 적자를 보면서 팔고 있다"며 "조합 내에 45개 업체가 있는데 다들 누군가 먼저 쓰러지면 자신은 상황이 조금 나아지지 않겠냐며 남 못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평택에서 휴대폰 케이스를 생산해 대기업에 납품하던 C사는 지난해 사업을 그만뒀다. 끝없이 내려가는 납품단가 때문에 더 이상 사업을 할 수가 없다고 판단해 스스로 문을 닫은 것이다. 납품단가 문제는 C사의 경우처럼 조만간 국내 중소기업을 모두 죽이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결국 대기업마저 무너지게 된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한 A사는 최근 중국에 진출한 외국 다국적 기업에 부품을 납품하기 시작했다. 국내에서는 도저히 단가를 맞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회사는 납품단가 문제 해결을 위해 중국과 일본 진출을 확대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현재 중국에 납품하는 가격은 국내 가격보다 더 높다고 B사장은 귀띔했다. 좋은 부품을 국내 대기업이 쓰지 못하면 완성제품의 질은 당연히 낮아진다. 이는 불량 증가와 판매 감소로 이어져 국내 대기업의 목을 죌 수 밖에 없다. 상황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최대 원인 중의 하나로 원일식 전기공업협동조합 이사장은 '구두(口頭)발주'를 거론했다. 대기업은 공사를 수주하거나 주문을 받으면 일단 중소기업에 부품부터 빨리 생산하라고 독촉한다. 이 때 단가는 얼마, 수량은 얼마 해서 계약서를 작성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대기업은 "단가 인상 요인이 있으면 다 계산해줄 테니까 가능한 대로 많이 생산해서 납품을 해달라"고 말한다. 정작 납품을 하고 계약서를 작성할 때는 "지난 번 단가가 이랬으니까 이번에도 그대로 하자"거나 아니면 "이번에 상황이 좋지 않으니까 단가를 조금만 깎자"고 요구한다. 수량은 나중에 정해지기 때문에 과잉 생산으로 재고로 쌓이는 경우가 많다. 원 이사장은 그렇다고 처음 납품을 요청 받을 때 서면계약을 체결하자고 말하는 것은 사실상 무리라고 지적한다. 갑을 관계가 명확한데 갑(대기업)에게 서면계약을 하자고 하는 것은 더 이상 거래를 하지 않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중소기업 사장들은 납품단가 문제는 대기업이 스스로 인식하기 전에는 해결하기가 어렵다고 강조한다. 중소기업 쪽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특정 제품을 유일하게 공급하는 위치에 있지 않고서는 단가 인하 압력에 맞서는 순간 사업을 접어야 하는 게 국내 중소기업의 현실이다. ■ 중소기업, 이것을 바란다 원자재 가격과 납품단가 연동… 표준하도급계약서 사용 의무화를 대부분의 중소기업들은 고질적인 납품단가 인하 요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원자재 가격과 납품단가의 연동을 제시한다. 원자재가는 중소기업의 의지와 상관 없이 움직인다. 다른 부분을 줄여 생산원가를 낮출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 마진을 포기할 수도 있지만 원자재 만큼은 자신들의 제어 대상에서 벗어난다. 따라서 이 부분만 대기업이 인정을 해줄 수 있다면 나머지는 중소기업들이 생산성 향상 등의 노력을 통해 보전해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현재 원자재 가격 변동 등 단가변동 사유가 발생할 경우 단가조정에 대한 근거는 공정거래위원회의 '표준하도급계약서', '대ㆍ중소기업간 협력적인 계약체결을 위한 가이드라인' 지침에 규정돼있다. 공정위는 표준하도급계약서나 가이드라인을 사용할 경우 벌점 감면 등의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표준하도급계약서는 벌점 2점, 가이드라인은 벌점 3점을 감면해준다. 하지만 문제는 공정위가 계약자유의 원칙에 따라 이를 의무사항이 아닌 권장사항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현실적으로 대기업이 거래에서 우월적 교섭력을 남용하는 것을 감안할 때 물가, 원자재가, 환율 변동 등 단가변동 사유가 발생하더라도 변경계약에 의해 납품단가를 조정하기는 사실상 무리다. 따라서 중소기업들이 주장하는 것은 표준하도급계약서에 원부자재 가격 변동에 따른 납품단가 연동제를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표준하도급계약서 사용을 의무화하자는 것이다. 서병문 중소기업중앙회 납품단가현실화특별위원회 위원장은 "법은 충분히 마련돼있다"며 "법으로 되지 않는 현실을 얘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계약서는 작성하지도 않고 말로만 발주해놓고 나중에 단가를 후려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법이 있으면 뭐하냐"며 "방법은 표준하도급계약서 사용 의무화"라고 강조한다. 공정위 역시 납품단가 연동이 합리적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공정위 관계자는 그러나 "부당 하도급 결정에서 연동 여부가 가장 중요한 잣대"라면서도 정작 이를 의무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난색을 표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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