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세계경제의 판이 바뀌고 있는 시기입니다. 외환위기 이후 굳어진 보수경영의 틀로는 미래의 기회를 잡을 수 없습니다.” (한창수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가끔은 재무제표를 위한 경영인지, 지속성장을 위한 경영인지를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경영활동의 목표가 성과ㆍ효율ㆍ주가 등 숫자로 된 지표에만 매몰돼 있습니다.” (10대 그룹의 한 고위관계자) 지난 IMF 외환위기 때 방만한 경영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른 한국 기업들은 이후 단기 성과관리에 치중하는 서구식 보수경영의 틀을 도입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재무제표에 나타나는 단기성과나 주식가치 등에 매달리는 보수경영의 한계에 대한 비판이 활발하게 일고 있다. 이 같은 경영활동으로는 기존의 수익모델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와해성 기술(disruptive technology)’과 인수합병(M&A)에 따른 지각변동 등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는 변화의 속도가 과거보다 빠르다. 미래에는 더욱 빨라질 게 분명하다. 한국 기업들도 위기상황에서 보수경영의 틀을 깨고 새롭고 과감한 경영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장기적ㆍ직관적 결정이 사라졌다=외환위기 이후 한국 기업들은 재무제표를 중심으로 한 관리경영과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는 회계를 도입했다. 실제 이 같은 경영기법들은 과학적인 엄밀함과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졌으며 과거의 문어발식 공격경영의 폐해를 막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경영의 보수화가 정착됐다. 한창수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이 시기부터 리스크를 껴안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도전하는 과감한 의사결정이 사라졌다”면서 “특히 장기적ㆍ직관적인 의사결정이 없어졌다”고 진단했다. 4대 그룹의 한 고위관계자는 “과거에는 대기업 오너 경영자들이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면서 과감한 투자결정을 하는 뚝심을 보이곤 하지 않았느냐”며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지금까지는 재무제표, 순이익지표, 주식가치, 조직ㆍ개인별 성과 등 손에 잡히는 숫자로만 의사결정이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다 보니 장기적인 의사결정보다는 1개월ㆍ1분기ㆍ1년 단위의 단기성과 위주로 경영활동의 방향성이 정해졌다는 것이다. 안순권 한국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 연구위원은 “보수경영이 생존에는 유리할지 모르지만 위기를 기회로 삼는 경영의 묘수를 제한할 수 있다”면서 “특히 대기업의 경우 보수경영의 한계를 인식하고 과감한 채용ㆍ투자 등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연성을 높여라=보수경영의 가장 큰 단점은 ‘유연성’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단기성과 극대화만 추구하는 기업은 유연성을 비효율과 낭비의 원인으로 간주하고 이를 과도하게 제거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곤 한다는 것이다. 삼성연구소에 따르면 기업에서 유연성이 사라질 경우 ▦도전적 시도 위축 ▦기존의 성공사례에 대한 집착 ▦고객만족보다는 효율 극대화에 집착하는 효율지상주의 팽배 ▦조직 내외부 관계 경직 ▦고정자원에 대한 집착 ▦학습보다 통제 중시 ▦도덕적 해이 확산 등의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실제로 지난 1990년대 말 미국 월마트가 정보기술(IT) 인프라 구축 등 미래를 위한 투자에 나설 때 경쟁사 K마트는 단기성과와 기존 사업모델 강화에 집중하다 결국 2002년 파산보호를 신청했다. 미국 시어스백화점도 기존 방식의 강화에만 역량을 집중하다 홈쇼핑과 할인점이라는 유통혁명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른바 ‘와해성 기술’ 등장으로 한번에 위험에 빠진 것이다. 반대로 미국 3M의 경우 연 매출의 30%는 최근 4년간 개발된 신제품을 통해 달성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기술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다. 직원들에게는 하루 일과 중 15%를 자신의 업무와 관계없는 일로 보내라고 권한다. 그래서 탄생한 것들이 ‘메모지의 왕’으로 불리는 포스트잇(Post It) 같은 제품들이다. 국내 석유화학 기업의 한 고위관계자는 “글로벌 100대 기업들은 기존 수익모델에 안주하기보다 와해성 기술에 투자해 얻은 성과로 전체 수익의 61%를 창출하고 있다”면서 “그러나 경영진을 단기성과로 평가하는 시스템에서는 한계를 뛰어넘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위기를 시스템 전환의 기회로=지금의 위기야말로 한국 기업들이 보수경영의 틀을 깨고 한 단계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역사적으로도 시장이 바뀌는 시기에는 모두가 고통을 받지만 틀을 깨려는 노력을 한 기업이 새로운 미래를 맞았다는 것이다. 이준상 호주국립대 경제학과 교수는 “1980년 말 산업민주화로 임금이 오르자 기업들이 고부가 제품 생산체제로 전환했고 IMF 시기의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친 뒤 세계적인 한국 브랜드가 탄생했다”면서 “우리 기업만의 위기가 아닌 만큼 판이 흔들리는 이 시기를 잘 활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일부 기업들은 이번 위기를 시장지배력 강화의 기회로 활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김반석 LG화학 부회장은 임직원들에게 “현재의 위기는 생존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까지 나빠졌지만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춘 기업에는 경쟁사를 따돌릴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서 “살아 남는 데 치중하기보다는 격차 벌리기를 시도하라”고 주문했다. 한국무역협회의 한 관계자는 “내년에는 각 업종에서 국제적인 M&A 물량이 나올 것으로 본다”면서 “작은 업체들끼리 힘을 모아 도전할 경우 글로벌 플레이어가 될 기회를 잡을 수도 있는 만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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