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평화를 원한다'고 외치는데 왜 전쟁은 사라지지 않을까. 지금 이 순간 지구상 어딘가의 전장에서 적에게 총을 겨누는 군인도, 전쟁을 피해 몸을 숨긴 민초들도 모두 평화를 원한다. 다만 서로 다른 언어로, 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할 뿐이다. 9ㆍ11이후 전쟁과 테러로 얼룩진 세계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바벨'은 이렇게 서로간의 소통의 부재가 만들어낸 비극을 보여주는 영화다. 이미 전작 '21그램'을 통해 사람들간의 소외와 소통의 부재에 대한 치열한 성찰을 보여준 바 있던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은 '바벨'에서는 모로코, 미국, 멕시코, 일본을 넘나드는 스토리를 통해 이야기의 외연을 확장한다. 이를 통해 감독은 인간 대 인간의 소통을 넘어선 전 세계의 소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영화는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네 개의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전 세계 네 곳의 장소를 하나씩 비춰준다. 모로코에서는 목동들의 사소한 장난으로 인해 관광여행에 나섰던 수잔(케이트 블란쳇)이 불의의 총격을 당한다. 이에 그의 남편 리처드(브래드 피트)는 그녀를 살리기 위해 본국으로 도움을 청하고, 이를 테러사건으로 오인한 미국 정부에 의해 사소한 장난으로 시작된 사건은 일파만파 커진다. 미국에서는 리처드와 수잔의 아이를 돌보던 멕시코인 보모 아멜리아(아드리아나 바란사)가 여행을 떠난 후 소식이 없는 두 사람의 소식을 기다리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그녀는 아들의 결혼식을 보기 위해 멕시코에 가야 하는 상황. 결국 아멜리아는 리처드, 수잔의 두 아이를 데리고 국경을 넘어 멕시코로 간다. 멕시코에서는 아멜리아를 다시 미국으로 데려다 주기로 했던 그녀의 조카 산티아고(가엘 가르시아 베르날)는 피로연에서 술을 너무 많이 마셔 이성을 잃는다. 한편 영화의 또 한 곳의 무대인 일본에서는 수잔에게 발사된 총의 원래 소유자였던 일본의 야스지로(야쿠쇼 고지)가 아내의 죽음 이후 변해가는 그의 청각장애인 딸 치에코(기쿠치 린코)와 갈등한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모로코 땅에서 불의의 총격을 당한 미국인 부부, 태생적으로 의사소통의 장애를 느낄 수 밖에 없는 청각장애인 딸과 살고 있는 일본의 가장, 그리고 부모 대신 무단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국경을 넘나드는 보모 등 감독은 소통의 부재 상황에 떨어진 개인들의 황망한 상황을 보여준다. 그러고는 작은 소통을 통해 이 개인들이 삶의 돌파구를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소통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느긋하게 의자에 몸을 기대고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이 무질서하게 쏟아지다 어느 순간 하나의 이야기로 어우러지는 형식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기 때문. 게다가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의 깊이도 만만치 않다. 대신 화면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심경에 공감해 가면서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예기치 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진정한 소통이란 과연 가능할 것인가. 이런 쉽지 않은 질문을 던지는 이 영화를 통해 관객들은 평소 쉽게 해 볼 기회가 없었던 이 같은 깊은 성찰을 해 볼 기회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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