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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계한 신현확은 누구인가 정·관·재계 넘나든 한국 현대사 증인朴정권때 경제정책 총괄 '안정화 시책'주도…노태우 정부선 동자부 폐지등 개혁안 입안삼성물산 회장도 맡아 '삼성·TK 대부'별명 김민열기자 mykim@sed.co.kr 신현확 전 총리가 지난 76년 2월 보사부 장관시절 박정희 대통령을 수행하고 있다. 뒤쪽에 차지철 경호실장도 보인다. /연합뉴스 26일 타계한 신현확 전 국무총리는 제1공화국 탄생에서부터 5공화국 출범에 이르기까지 한국 현대사의 고비고비에서 정ㆍ재계, 관계를 넘나들며 큰 족적을 남겼다. 우리나라 경제개발의 '산증인'이었던 신 전 총리는 지난 78년 12월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을 총괄하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맡으며 '안정화 시책'을 강도 높게 추진한 결과 '안정론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4ㆍ17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은 70년대 한국경제를 성장발전시켰던 수출 드라이브 정책에서 벗어나 금융통화 긴축은 물론 수출지원 축소, 중화학 투자의 조정, 농촌주택개량사업의 축소까지 다루는 범위가 무척 광범위했고 인위적으로 묶여 있는 물가구조를 정상화하는 등 혁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물론 기업의 여신규모를 재벌 위주로 확정한 결과 중소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게 됐다는 비판도 받지만 관료들 사이에서는 정부 주도의 한국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시키려는 '최초의 시도'였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관료생활은 해방 전에 시작됐다. 세무관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경성제대 법문학부(오늘의 서울대 법대) 재학 시절(1943년)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 조선인 합격자로서는 처음으로 일본 도쿄의 상무성에서 근무했다. 해방 후 대구대학(청구대학과 합병한 지금의 영남대) 교수로 있던 그는 장택상(전 국무총리)씨의 권유로 관직에 복귀, 상공부 전기, 광무, 공업국장을 지내며 뛰어난 업무능력을 과시했다. 그러던 중 경무대로 호출받아 당시 이승만 대통령에게 직접 세부적인 정책을 설명했으며 능력을 인정받아 만 39세에 경제기획원의 전신인 부흥부 장관에 발탁됐다. 4ㆍ19 혁명 후 5ㆍ16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3ㆍ15 부정선거' 연루 혐의로 2년7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출감 후 쌍용산업 사장, 대한상공회의소 부회장 등을 맡으며 재계에 몸을 담던 그는 김성곤(쌍용그룹 창업주)씨의 추천으로 73년 9대 국회의원(공화당)에 당선됐다. 75년 보사부 장관 시절에 남덕우 전 총리와 함께 '의료보험안'을 통과시켰으며 78년에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맡았으며 박 전 대통령 서거 이후 5공화국 출범까지 6개월간 국무총리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국무위원들에게 비상계엄 선포를 요구했을 때 '그 이유를 대라'며 대통령의 시신까지 확인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79년에는 10대 국회의원에 다시 당선됐으며 정치계에서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는 성격 때문에 '대쪽'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12ㆍ12 당시에는 최규하 대통령이 신군부에 정승화 육참총장의 연행을 사후재가하는 현장을 직접 지켜봤고 80년 '서울의 봄' 때에는 비상계엄의 전국확대가 가결된 국무회의를 주재하는 등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 있었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TK(대구ㆍ경북)의 대부'라는 별명에 걸맞게 정계 인사들과 활발한 교류를 이어갔다. 86년엔 삼성그룹의 오늘날 지주회사 격인 삼성물산 회장으로 자리를 옮기며 한때 삼성그룹의 '정신적 대부' 역할을 맡게 된다. 노태우 전 대통령 재임 시절인 88년엔 행정개혁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동력자원부 폐지 등 개혁안을 입안했으며 99년엔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직을 맡아 기념관 건립 추진 등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입력시간 : 2007/04/26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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