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계적으로 부동산 중심 사회가 일본과 한국 두 나라인데 일본은 거품붕괴로 이미 무너지고 있고 이제 한국이 대표적인 부동산 중심 사회가 됐다.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선진화는 어렵다.” 지난해 3월 말 4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총재직에서 물러난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가 퇴임 이후 처음으로 한국 경제가 직면한 각종 현안에 대해 속시원히 자신의 견해를 털어놓았다. 박 전 총재는 “지금처럼 아파트 값이 평당 5,000만원까지 오르면 우리 자손들이 어떻게 집을 마련하겠느냐”며 “높은 주거비 때문에 일본처럼 ‘고소득-저생활국’으로 가고 있는데 서구형 ‘고소득-고생활국’으로 바꿔야만 후손들에게 불행을 물려주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9개월 만에 만난 박 전 총재는 그동안 퇴임 때 약속했던 것처럼 ‘완전한 자연인’으로 돌아간 듯했다. “적절히 바쁘고 적절히 한가하다. 책도 읽고 여행도 하고 글도 쓰고 있다”는 게 그가 밝힌 요즘 근황이다. 하지만 그의 ‘여유로운 생활’과는 달리 한국 사회와 경제에 대한 현실인식은 너무나 뚜렷했다. “이런 공식적인 일(인터뷰)은 처음”이라며 말문을 연 그는 통계수치 하나하나까지 꼼꼼히 챙겨가며 지역불균형ㆍ양극화ㆍ부동산 문제 등 산적한 우리 시대의 과제에 대해 거침없이 진단했고 해결방향까지 제시했다. 인터뷰 내내 수십년간 대학 교수부터 한은 총재까지 한국 경제의 현장을 두루 섭렵한 원로의 원숙미가 넘쳐흘렀다. 그는 “우리나라 선진화의 최대 걸림돌은 교육ㆍ주거ㆍ교통 등 ‘사회공공재의 위기’에 있다”며 “이를 해결하지 못할 경우 미국 수준의 국민소득을 이룰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선진국이 갖고 있는 삶의 수준은 따라잡기 힘들다”고 재차 강조했다. <선진화의 최대 걸림돌은 지역불균형발전> -한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풀어야 할 핵심과제는 뭐라고 보는지. ▦우리나라 선진화의 최대 걸림돌은 ‘사회공공재의 위기’이다. 중진국까지만 해도 국민생활의 기본문제는 쌀ㆍ옷ㆍTVㆍ자동차 등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개인재’였다. 그러나 중진국을 넘어 선진국으로 접어들면서 교육ㆍ주거ㆍ교통ㆍ환경 등 사회가 공동으로 노력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사회공공재(public goods)가 핵심 과제로 등장하게 됐다. 그런데 이것이 갈수록 나빠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공공재의 위기는 수도권과 지방간의 ‘지역불균형’ 발전으로 인해 심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학교만 하더라도 지방에는 텅텅 비어 있고 수도권에는 모자라 막대한 재원이 투입되고 있다. 집 문제도 마찬가지다. 지방은 남아도는데 수도권은 부족해서 투기가 일어나고 있다. 교통난과 환경난도 모두 수도권에서 발생하는 문제다. 지방에서도 일자리를 얻고 자녀를 교육시킬 수 있도록 해 인구ㆍ경제ㆍ교육 문화의 수도권 과잉집중을 차단해야 한다. -지역불균형을 바로잡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다면. ▦산업정책과 교육정책에서 특단의 개혁조치가 필요하다. 수도권보다도 지방에서 공장을 짓도록 산업정책을 지방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 예를 들어 지방을 경제특구로 지정하고 지방기업에는 법인세 등 가능한 모든 세금을 30~50% 가량 인하해주거나 지방에 대한 신규 투자에 대해 특별상각을 허용하고 특별금융지원을 해줄 필요가 있다. 교육의 경우 대학입시에서 내신성적 실질반영률을 50% 이상으로 높이고 나머지는 대학에 맡겨야 한다. 정부가 2008년부터 실시하겠다는 내신성적 반영률 50%는 명목 반영률이어서 실질반영률은 6%에 불과하다. 교육정책의 개혁은 부동산대책으로서가 아니라 교육정상화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대학 재학 중 성적은 수능성적과 무관하고 내신성적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은 이미 여러 대학에서 검증됐다. 서울 학생과 지방 학생들의 잠재력을 나타내는 유전자의 우열은 같다고 봐야 한다. 수능성적 차이는 후천적 환경차에 기인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선천적 잠재력을 나타내는 내신성적과 후천적 개발도를 나타내는 수능성적을 동등하게 배려해야 한다. -최근 제기되고 있는 서울의 고등학교 학군 단일제는 어떻게 평가하나. ▦서울을 단일학군 추첨제로 (통합)해야 한다. 그래서 학교선택권을 학생에게 개방해야 한다. 선진국을 보면 명문 고등학교가 흔히 부촌에 몰려 있는 수가 있지만 학생 선발은 모두에게 개방돼 있다. 서울대 입학자격을 관악구민에게만 준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현재 일부 비율만 외부 거주자에게 개방하도록 하는 방안이 거론되는데 100% 단일학군으로 개방해야 한다. 혹자는 교통난을 우려하는데 그것은 서울시가 걱정할 일이다. 또 열악한 고등학교를 걱정하는 사람도 있는데 고등학교도 경쟁원리를 도입해야 한다. <부동산과 종부세 문제> -부동산 가격 급등도 지역불균형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가. ▦그렇다. 집값 문제도 지역불균형발전 때문에 생긴 수도권의 문제다. 지금 농촌에는 집이 텅텅 비어 있고 지방은 도시라고 해도 집값이 매우 싸다. 서울 사람은 지방에 직장이 있어도 서울에 거주하고 지방에 사는 사람은 웬만큼 형평만 되면 자녀교육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서울에 집을 마련하고 있다. 외부 가수요가 서울 집값 문제의 근본 원인이다. -부동산 문제의 해결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하나. ▦신도시 건설로는 강남 대체가 불가능하고 강북의 공동화만 촉진할 뿐이다. 신도시 건설은 미봉책이고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킨다. 신도시 건설로 인해 연 15조원의 토지보상비가 나가는데 이것이 집값 상승의 또 하나의 원인이 되고 있다. 15년 전의 분당ㆍ일산 등 5대 신도시 건설도 그 약발이 6~7년밖에 가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신도시를 건설하면 지역불균형은 더욱 확대되고 우리나라의 ‘공공재 위기’는 더 깊어질 것이다. 이를 해결하려면 지역균형발전 개혁조치를 통해서 외부 가수요를 차단해야 한다. 강남 대체는 강북의 공영재개발로 대처하는 것이 최선이다. -종부세에 대한 사회적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부동산 보유과세 강화는 박정희 정권 때부터 하려다 여러 가지 저항 때문에 못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번의 보유세 강화 조치는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 역사적인 개혁조치였다고 평가할 만하다. 보유세 부담률(선진국은 시가의 1~2%, 한국은 시가의 0.1%)이 선진국에 비해 너무 낮아 부동산 중심 사회가 됐다. 보유세가 너무 낮다 보니 불필요하게 큰 집과 넓은 땅을 점유하게 돼 주택과 토지의 낭비가 생겼다. 급기야 주택이 주거수단에서 축재수단으로 변질돼 투기수단이 됐다. 가계저축의 부동산과 금융저축간 비율이 미국은 3대7인데 우리나라는 7대3이며 이것이 삶의 질 향상과 산업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부동산 중심 사회가 일본과 한국 두 나라인데 일본은 거품붕괴로 무너지고 이제 한국이 대표적인 부동산 중심 사회가 됐다. 여기서 벗어나지 않으면 선진화는 어렵다. 지금처럼 아파트 값이 평당 5,000만원으로 오르면 우리 자손들은 어떻게 집을 마련하겠는가. 높은 주거비 때문에 일본처럼 ‘고소득-저생활국’으로 가고 있는데 서구형 ‘고소득-고생활국’으로 바꿔야만 후손들에게 불행을 물려주지 않을 것이다. -양도소득세와 반값 아파트에 대한 견해는. ▦양도소득세를 경감하자는 의견이 있는데 보유과세 강화 문제가 어느 정도 정착되면 단계적으로 검토될 수 있다고 본다. 양도소득세를 내리면 단기적으로는 주택공급을 늘리는 효과가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부동산 투기를 조장하게 된다. 또 이 세금은 성격상 불로소득에 대한 과세라는 점에서 당장 인하하는 것은 어렵다고 본다. 그리고 분양가 규제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회정책적 주택이라면 모르지만 일반 주택이라면 주택가격은 분양가보다 시장가격이 문제라는 점, 그리고 분양가가 시가보다 낮으면 그 차익은 입주자에게 불로소득을 줘 가수요와 투기를 부추길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러므로 시장가격 이하로의 규제는 사회정책적 주택에 국한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여야에서 제기되는 반값 아파트 문제에 대한 논의는 정치적 목적과 결부되지 않도록 신중해야 된다. 현재까지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결국 국가가 땅을 공급해야 된다는 말인데 사회정책적 주택에 대해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러나 부유층 주택을 포함해 모든 주택을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는지는 좀 더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집값을 잡기 위해 금리를 올리면 서민들의 부담이 더욱 늘어나는데. ▦현재 부동산 버블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이는 저금리에서 기인하는 것이고 저금리는 저물가에, 저물가는 ‘친디아(Chindiaㆍ중국+인도) 효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친디아’로 인해 세계는 21세기 들어 ‘고성장-고이윤-저물가’ 시대를 맞고 있다. ‘고성장-고이윤’이라면 균형금리(경제성장률+물가)가 높아야 하는데 중앙은행은 물가를 기준으로 금리를 정하기 때문에 세계적으로 저금리 시대를 맞고 있는 것이다. 저금리가 되면 과잉유동성이 생기고 부동산에 거품이 끼게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에서도 큰 흐름으로 보면 금리를 올리고 과잉유동성을 환수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할 것이다. <2007년 경제전망> -올해 한국경제에 대한 걱정이 많다. ▦지난해 경제와 연속선상에 있다. 거시는 좋지만 민생은 어려운 양극화가 지속될 것이다. 4%대 초반의 경제성장과 2%대의 물가, 균형수준의 경상수지가 예상되는데,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이 4~5%임을 감안할 때 거시경제는 전체적으로 양호하다 할 것이다. 유가와 환율의 안정, 저금리와 저물가의 지속, 개방이익의 확대, 세계경제의 고도성장 지속 등 전반적으로 기업경영에 유리한 환경이 이어져 대기업은 사상 최고의 이익을 거두며 한국 경제의 성장을 견인할 것이다. 그러나 대기업 호황과는 달리 가계는 여전히 불황을 겪을 것이다. 중소기업ㆍ자영업ㆍ농업 등 경쟁력이 열악한 민생 부분의 침체, 그리고 산업합리화와 유통 현대화로 인한 ‘고용 없는 성장’ 추세가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국내 투자의 정체현상도 개선을 기대할 수 없는 만큼 가계불황으로 인한 민생고와 소득분배의 악화현상은 여전할 것이다. -양극화 현상을 세계화에 따른 결과라고 진단을 내렸는데. ▦80년대에는 경제성장률, 가계, 기업소득 증가율이 같았다. 가계 부문과 기업 부문이 균형성장을 한 셈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성장률은 4~5%인 반면 가계소득은 0%, 기업소득 증가율은 30~50%라는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면서 소득분배도 차별화되고 있다. 이런 양극화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세계적으로 공통된 현상이다. 양극화는 ‘정책 실패’라기보다 글로벌리제이션(globalizationㆍ국제화)과 친디아 저임금 효과를 중심으로 한 세계 경제의 환경변화에 따른 결과다. 다시 말하면 경쟁력 우위 부문(대기업)과 중소기업ㆍ자영업 등 열위 부문간의 차별화가 나타나게 마련인데 ‘고용 없는 성장’과 국내 투자부진으로 인해 대기업 소득이 가계 부문으로 제대로 환류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따라서 이러한 양극화는 구조조정이 어느 정도 마무리될 것으로 기대되는 향후 약 10년 정도는 지속될 것이다. -그럼 양극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양극화에 대한 대응방안은 두 가지를 중심으로 해야 된다. 하나는 국내 투자 및 고용증진 정책이다. 가령 노사관계의 개선, 규제완화, 정부의 인센티브 정책, 공공투자정책의 활용, 외국투자의 유인 등 다각적인 투자 및 고용증진 환경을 조성해주는 일이다. 또 하나는 양극화의 대세는 막을 수 없기 때문에 낙오되는 사람을 위해 ‘사회 안전망’을 강화하는 일이다. 특히 자영업과 농업에서 도태되는 사람 그리고 실업자를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국가적 이슈가 됐다. ▦우리 경제의 미래를 생각할 때 어려움이 있더라도 한미 자유무역을 통해서 세계시장의 중심부라 할 만한 미국시장에서의 자유경쟁에 기꺼이 참여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미 FTA를 적극 추진하되 다만 이로 인해 피해를 입는 부문에 대해 충분한 보상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미국과의 자유무역은 고통도 수반하겠지만 우리 경제의 구조조정을 촉진하고 한 단계 레벨업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박승 前 한은총재는 누구?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한국 경제발전의 산증인'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대표적인 인사 중 한명이다.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76~88년), 청와대 경제수석(88년), 건설부 장관(88~89년), 대한주택공사 이사장(93~96년), 한국은행 총재(2002~2006년) 등을 역임하며 한국경제의 발전과 호흡을 같이했다. 그는 화려한 경력과는 달리 30년 이상 서울 강북의 변두리(은평구 갈현동)에서 살고 있고 거창한 호텔 식사보다 무교동 설렁탕집을 즐겨 찾는 소탈한 성격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어릴 적 가정형편이 어려워 이리공고에 진학한 뒤 매일 20리를 뛰어서 통학했고 대학 입학시험을 치르던 날에는 어머니가 싸준 고구마 5개로 점심을 때웠다는 일화도 있다. 그는 서울대를 졸업한 후 지난 61년 당시 최고직장이었던 한국은행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한은 해외유학 장학생 1호'로 선발돼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건설부 장관 시절에는 분당ㆍ일산 등 5개 신도시를 입안하기도 했다. 학계와 정부를 종횡무진으로 넘나드는 경력을 쌓던 박 전 총재는 카드 남발을 통한 인위적 경기부양이 절정이었던 2002년 친정인 한은으로 돌아왔다. 임기 초반 정부의 입김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뚝심'으로 금융통화위원회의 독자적인 결정권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비록 자연인으로 돌아갔지만 인터뷰 당일 오전4시30분에 일어나 2시간 동안 준비할 정도로 일에 대한 정열은 여전히 뜨거웠다. 퇴임 후 9개월여 만에 첫 인터뷰를 한 그는 "앞으로도 현실과 일정 거리를 두겠지만 경험을 가진 사람으로서 꼭 필요할 때에는 한마디씩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 약력 ▦36년 전북 김제 ▦이리공고ㆍ서울대 경제학과 ▦61년 한국은행 입행 ▦76~2001년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86년 금융통화운영위원 ▦88년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 ▦88~89년 건설부 장관 ▦93~96년 대한주택공사 이사장 ▦97년 교통개발연구원 이사장 ▦2001년 공적자금관리위원회 민간위원장 ▦2002~2006년 한국은행 총재 /김민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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