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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피공화국] 3. 잘해봐야 본전 실패땐 패가망신

퇴출당한 은행의 임원을 지낸 K씨. 그는 퇴임한 이후 오히려 더 바쁘다. 한 건설회사의 여신 지급건에 대한 부실책임으로 재산압류는 물론 20억원 가량의 손해배상 소송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K씨는 요즘 당시 대출결정이 관행에 따른 것이었으며 또 실질적인 권한은 자신에게 없었다는 증거를 찾는 데 골몰하고 있다. 외환위기 당시 부실 금융회사 임원으로 종사했던 사람들은 당시 관행적으로 해왔던 대출행위 때문에 대부분 발목이 잡혀 있는 상태다. 재산을 압류당한 것은 기본이고 손해배상청구 및 검찰고발까지 당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이 때문에 금융회사 종사자들 사이에는 "한번 의사결정에 실패하면 평생이 망가질 수 있다"는 의미로 '성공하면 보너스 100%, 실패하면 100억원짜리 손해배상''잘해봤자 본전이고 잘못되면 패가망신'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 ▲ 아직도 외환위기 후유증 지난 99년 6월부터 시작된 예금보험공사의 부실 금융회사 임직원에 대한 조사가 어느덧 3년차에 접어들었다. 부실책임 조사는 막대한 공적자금을 들어가게 한 해당 임직원에게 책임소재를 분명히 해 무분별한 대출세일이나 일방적인 지시에 의한 대출관행을 고치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이면에는 조금이라도 리스크가 있는 대출은 일단 피하고 보자는 면피주의 대출심사라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 특히 99년 12월부터 시작된 종금사(56건) 및 은행(14건) 등에 대한 소송 중 1심 판결이 난 곳이 하나뿐이라는 사실은 그만큼 책임소재에 대해 명확한 선을 긋기가 어렵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외에도 환란 당시 적극적으로 외화자산을 운용하다 실패한 해외지점장이나 간부들의 경우 국내에서 인사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 결정적인 실수 외에는 면책을 해주는 선진 금융기관들과는 달리 세계적인 금융위기마저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는 책임론이 번지고 있는 것이다. 예보의 한 관계자는 "은행ㆍ종금 등은 아직까지 소송결과가 나오지 않아 자신들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잘못하고 있는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며 "다만 금융개혁을 진행하는 상황에서 억울하게 민사소송에 휩싸인 사람들의 경우 사면해주는 제도적 장치의 필요성을 느낀다"고 말했다. ▲ 금융 최고경영자(CEO)들, '책임지는 일 안한다' 상황이 이쯤되다 보니 공적자금을 받은 금융회사 간부들이 '부실경영인'으로 낙인 찍힐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불법행위가 없더라도 자신들의 심사를 거친 대출이 문제가 생길 경우 전재산을 날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부실로 회사문을 닫은 곳은 물론 영업 중인 금융회사 임원들, 나아가 금융회사에 부실을 입힌 기업들까지 예보의 손해배상 청구소송 범위에 포함돼 있다. 예보는 그동안 은행ㆍ증권ㆍ보험ㆍ종금ㆍ금고 등 관련법이나 규정을 위반해 회사에 부실을 입힌 대주주와 임직원 2,200여명에 대해 부실대출책임을 물어 재산가압류조치를 내렸다. 또 횡령 등 불법행위여부를 파악해 7,000억원에 이르는 손해배상 소송을 해당 금융기관의 파산관재인에게 의뢰했다. 공적자금을 투입받은 한 은행의 임원은 "이미 회사 내 임직원들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모두 뒤집어쓸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 확산돼 있다"며 "조금이라도 책임소지가 생길 것 같은 일은 아예 맡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고충을 털어놨다. ▲ 몸 사리기는 기본, 대출도 나 몰라라 최근 혐의가 없다는 법원의 1심 승소판정을 받은 한 신용금고 임원은 친척들에게 이제 한시름 놓게 됐다는 안부전화를 했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예보가 압류한 재산을 풀어주기는커녕 다시 항소한 것이다. 예보의 총소송제기 건수 491건 중 심사가 끝난 것은 60여건에 불과하며 대부분 신협과 금고에 국한돼 있다. 이중 신용금고의 경우 1심 진행 중인 것은 49건(1심 종결 18건)이며 현재 2심 진행 중인 것은 10건, 3심 진행도 1건 있다. 예보는 기관이 특성상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광잉문책- 면피주의-대출기피-기업자금난의 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보다 높은 차원의 해결책을 내려야 한다는 주문이다.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는 긍정적 효과와 면피주의를 낳는 부정적 효과를 잘 가려 새롭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지금처럼 일방적인 '책임묻기'가 만연할 경우 앞으로 금융회사들의 위험한 기업들에 대한 대출을 꺼리는 현상은 더욱 고조될 것이다. 소뿔을 고치려다가 소를 죽이는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해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김민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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