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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는 지난 1976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냈다. 이 사업으로 현대그룹은 막대한 외화를 벌어들인 것은 물론 값진 경험을 토대로 사우디 라스알가르 항만과 쿠웨이트 슈아이바 항만, 두바이 발전소 등 잇단 해외 수주에 성공하며 초고속 성장을 거듭한다. 40년 가까이 지난 지금 해양플랜트 부실로 수조원대의 적자를 기록하며 위기에 빠진 현대중공업은 다시 사우디에서 새 기회를 찾고 있다. 정 회장의 빈자리는 그의 손자 정기선 현대중공업 기획실 총괄부문장(상무)이 대신하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11일(현지시간) 사우디에서 현지 국영 석유회사인 아람코와 합작 조선소를 설립하고 엔진과 플랜트 분야의 협력을 강화하는 내용의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고 12일 밝혔다. 아람코는 세계 원유 생산량의 15%를 공급하는 세계 최대 석유회사로 석유운송과 플랜트 등 주요 기간산업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서명식에는 현대중공업의 김정환 조선사업 대표와 박철호 플랜트사업 대표, 정 상무 등이, 아람코에서는 아민 알나세르 사장을 비롯한 핵심 경영진이 참석했다.
MOU에 따라 두 회사는 사우디 국영 해운사 바리 등과 함께 합작 조선소를 짓는다. 현대중공업은 사우디에서 발주하는 선박에 대한 수주 우선권을 확보하고 조선소 운영에도 참여한다. 이 조선소는 사우디 선박 수요에 특화돼 장기적으로 현대중공업의 중동 내 입지를 강화하고 수익에도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선박용 엔진 분야에 대한 공동사업도 이번 MOU에 포함돼 현대중공업이 독자 개발한 '힘센 엔진'의 중동지역 수출이 탄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 플랜트 사업 협력을 통해 현대중공업의 중동 수주가 늘고 아람코의 현지 금융과 인력 지원을 토대로 대형 설계·구매·시공(EPC) 사업의 리스크도 낮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이밖에 두 회사는 플랜트와 정유·전기전자 사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을 확대하기로 했다.
이번 MOU는 새로운 사업기회를 찾는 현대중공업과 제조업 육성에 나선 사우디 간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며 급물살을 탔다.
특히 정 상무는 이번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을 지휘하며 현대중공업 3세 경영이 본격화했음을 알렸다. 정 상무는 올봄 울산 현대중공업을 찾은 할리드 알팔리 전 아람코 사장(현 아람코 회장 겸 사우디 보건장관)과 알리 이브라힘 알나이미 사우디 석유장관 등을 직접 맞았으며 이후 전담조직(TF)을 꾸리고 수시로 사우디를 오가며 실무협상을 벌여왔다. 정 상무는 "주베일 산업항 공사로 현대의 성장을 이룬 것은 물론 사우디 산업도 발전시켰다"며 "이번 아람코와의 협력으로 우리 조선·플랜트 산업이 재도약할 것"이라고 밝혔다.
알나세르 사장은 "사우디는 1976년부터 정주영 회장, 현대중공업과 인연을 맺어왔다"며 "사우디에서 사업기회를 찾는 예리함은 정주영 회장 일가의 DNA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임진혁기자 liberal@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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