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이 해운업계 1위인 한진해운과 2위인 현대상선의 합병을 권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시장은 한때 충격과 혼란에 빠졌다. 해운업의 구조적인 불황을 맞아 덩치를 키워 경쟁력을 높이자는 취지라지만 시장 현실과 동떨어진 무리수라는 비판이 잇따랐다. 곧이어 발표된 롯데그룹의 삼성그룹 화학계열사 인수는 자율 빅딜임에도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정부 주도 기업 구조조정과 시장 자율합병이 맞물리면서 또 다른 빅딜설이 꼬리를 물고 있다. 2일 예비입찰이 마감된 대우증권 인수 게임은 산업 구조조정과 별개로 추진되지만 벌써부터 A사가 유력하다는 관측이 파다하다. 구조조정 시장에 어설픈 관치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는 의구심은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둔 정부가 밀린 숙제 하듯 몰아치기식 구조조정에 매달리면서 시장의 불신이 깊어지고 있다. 기업 구조조정의 환부를 신속·정확하게 도려낼 전문가는 없고 컨트롤타워는 중심을 잡지 못한 채 갈지자 행보를 보이고 있다.
금융당국이 발표한 산업은행의 비금융 자회사 매각도 개별 기업의 산업적 특성이나 시장 상황을 외면한 채 시한에 쫓기듯이 밀어붙이는 모양새다. 산은의 한국GM 지분 매각이 기술적으로 어려운데도 매각 리스트에 담은 것은 대우조선 퍼주기 비판을 피해가기 위한 숫자 부풀리기라는 지적이 적지 않다.
전 재정경제부·금융위원회 고위관료 출신의 구조조정 전문가는 "지금은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와 다르게 산업 소프트웨어 구조조정이 필요한 시기"라며 "채무 구조조정을 넘어 훨씬 복잡한 산업의 밑그림을 그려야 하는데 이는 민간의 몫이지 정부 주도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구조조정은 고통이 따르는 작업으로 저항을 뚫을 정도로 정교하게 진행해야 한다. 우선 대상부터 명확해야 한다. 타이밍이 중요하고 효과가 나타날 때까지 인내력도 필요하다. 2009년 채권금융기관조정위원장을 맡았던 김병주 서강대 교수는 "총선을 앞둔 시점이어서 구조조정 의지가 허물어질 수밖에 없다"며 "총선 이후 시동을 걸어야 과감하게 추진할 수 있다"고 꼬집었다.
작업을 진두지휘하는 컨트롤타워도 분명해야 한다. 지난달 13일 금융위원장을 총괄로 한 범정부협의체가 발족했지만 힘이 부치는 모습이 역력하다. 재계 고위관계자는 "해운사 합병 문제만 하더라도 금융당국은 합치라고 종용했지만 실무부처는 반대 의견을 낸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 실무를 담당한 전직 고위관료는 "기업 구조조정은 시스템 개혁"이라며 "대통령이 직접 컨트롤타워에 힘을 실어줘야 하고 칼자루를 쥐면 분명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세종=김정곤기자 mckids@sed.co.kr 임세원기자 why@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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