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유소에서 여러 회사의 기름을 섞어 파는 '혼합판매'를 두고 정유 업계와 주유소 업계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주유소 업계는 '거대 정유사의 횡포'를 지적하는 반면 정유업계는 일선 주유소의 혼합판매를 막은 일이 없을뿐더러 소비자들의 선택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일부 업계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기름값 인하를 위해 정부가 혼합판매를 도입하면서 오히려 업계의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4일 업계에 따르면 한국주유소협회는 이르면 이달부터 여러 정유사·수입사들로부터 제품을 들여오려는 주유소들에 법률지원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정유사와 주유소 사이에 한국주유소협회의 의뢰를 받은 전담 변호사가 나서 제품구매 계약을 돕는 방식이다.
A정유사와 계약을 했더라도 B정유사 등 다른 곳에서 석유제품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해 혼합판매 주유소를 늘린다는 취지다. 한국주유소협회 관계자는 "여전히 정유사 눈치를 보느라 한 정유사 제품만 구입하는 주유소가 있다"며 "이들의 혼합판매가 가능하도록 계약 전환을 돕는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2012년 정부가 도입한 혼합판매는 주유소가 여러 정유사·수입사의 석유제품을 한 탱크에 저장했다 판매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한마디로 '구입처 다변화'로 시장 경쟁을 촉진해 기름값 인하를 이끌어낸다는 것이 정책목표였다. 당시에도 정유 업계와 주유 업계에서는 찬반 논란이 치열했다.
주유소 업계는 혼합판매 활성화를 정유사가 막고 있다고 주장한다. 계약관계인 주유소가 타사 제품을 판매할 경우 불이익을 주는 방식으로 일종의 독점계약(전량구매 계약)을 강요한다는 것이다. 주유소협회 측은 혼합판매가 활성화되면 소비자에게 가격 인하 효과가 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반면 정유 업계의 시각은 전혀 다르다. 소비자들이 혼합판매 자체를 선호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정유사의 한 관계자는 "혼합판매 주유소에서는 포인트 적립 등이 불가능해 소비자들이 잘 찾지 않는다"며 "혼합판매 표시를 한 주유소가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현재 전국 주유소 중 30%가량이 혼합판매를 하지만 대부분 이를 소비자들에게 알리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원하는 제품이 아닌 다른 기름을 주유하고도 모르는 소비자들이 생겨난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정유업계는 혼합판매를 막은 적이 없다는 입장이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이미 공정거래위원회가 제시한 '표준계약서'에 따라 주유소가 자유롭게 공급물량을 정할 수 있도록 했다"며 "주유소 업계가 극히 일부 사례를 내세워 무리한 주장을 펴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이와 관련해 전문가들은 정부가 알뜰주유소·전자상거래와 함께 '석유 3대 정책' 중 하나인 혼합판매를 시장 상황에 맞지 않게 도입해 업계 갈등을 부추긴다고 지적했다.
김형건 강원대 경제무역학부 교수는 "혼합판매는 지금까지 소비자들로부터 긍정적인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는데다 정유사가 브랜드 관리에 들이는 노력을 무시해 경제적으로, 법적으로도 문제"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석유제품을 얼마나 섞어 파는지 확인하기도 어렵고 가짜 석유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소재가 불분명해진다"고 덧붙였다.
이밖에 섞인 석유제품이 자동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없는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기름값 인하를 위해 무리하게 시장에 끼어들면서 혼란과 갈등을 초래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유주희기자 ginger@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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