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희도 달러 조달비용만 없다면 글로벌 투자은행(IB) 업체들과 해볼 만합니다. 다만 금리로 붙으면 경쟁력이 없다 보니 정면승부보다는 틈새시장 공략에만 주력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한 시중은행 IB담당 고위관계자는 최근 서울경제신문과 만나 해외 IB시장 진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글로벌 IB 업계에 잇따라 큰 장이 서고 있지만 국내 은행들은 이 같은 특수를 누리기에는 글로벌 은행들과 출발선상부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정부가 보유외환이나 외국환평형기금 등을 시중은행들에 저리로 빌려줘 활로를 열어줘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자금조달 경쟁력 확보가 관건=국내 은행들이 그나마 수주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아시아 인프라 사업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와 싱가포르를 잇는 130억달러 규모의 '말레이시아·싱가포르 고속철도사업'이다. 내년 말께 사업자 선정이 완료되는 이번 사업을 위해 철도공사·현대건설·현대로템 등 50여개 업체가 컨소시엄을 구성했으며 국민은행과 KEB하나은행 등이 재무적투자자로 참여했다. 이번 사업은 청와대에서까지 관심을 기울일 정도로 규모가 커 정부가 사실상 이번 사업을 주도하는 것으로 전해졌으며 일본과 중국 외에 프랑스·독일 등 유럽 국가까지 관심을 보이고 있다.
문제는 자금조달이다. 글로벌 IB 사업인 만큼 채권 발행이나 글로벌 은행에서 차입하는 방식을 통한 달러 조달이 필수여서 경쟁 국가들에 비해 불리함을 안고 시작할 수밖에 없다. 시중은행의 한 고위관계자는 "유로화나 일본 엔화는 사실상 달러 못지않은 위상을 갖고 있으며 중국 또한 역마진이 우려될 정도로 IB시장에서 상당히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정부 차원에서 관심이 크다고는 하지만 자금 경쟁력이 약한 국내 업체 컨소시엄이 이번 고속철 사업을 수주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해당 컨소시엄에서는 자금을 저리로 조달하기 위해 글로벌 IB 업체들과 접촉을 시도하고 있으며 글로벌 컨소시엄으로의 전환까지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인력 구성과 운용도 문제다. 별다른 성과급을 지급하지 않는 은행 급여 체계하에서 IB담당 직원을 외부에서 영입하거나 인재를 장기 육성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시중은행 IB담당자는 "글로벌 IB 부문에서 빠른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IB 전문업체의 해당 팀을 통째로 영입하거나 부행장급 이상의 임원을 데려와 조직문화 자체를 바꿔야 한다"며 "무엇보다 IB 관련 인력 양성을 위해 지속적인 투자를 해야 하는데 초기 비용부담을 감당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라고 전했다.
시중은행들은 이런 형편에서도 활로 찾기에 애쓰고 있다. 몇몇 은행은 베트남이나 필리핀 등 동남아 지역에서 회사채 발행이나 비교적 규모가 작은 신디케이트대출 참여를 통해 노하우를 쌓고 있다. 단 해당 지역에서는 기업공개(IPO)가 드물 정도로 자금시장 자체가 발달해 있지 않아 지속적인 수익을 기대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다. 동남아에 진출한 현지 법인이 고객에게 받은 예금을 통해 현지 화폐로 IB사업에 나서는 경우도 있지만 아직 가시적인 성과는 내지 못하고 있다.
◇"외환 활용 통로 열어달라"=이와 관련해 몇몇 시중은행들 사이에서는 보유외환이나 외국환평형기금 등을 정부가 시중은행들에 저리로 제공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국내 외환보유액은 지난달 기준으로 3,696억달러에 달하며 외국환평형기금의 외화대출은 올 들어 지난 7월 말까지 128억달러 수준이다. 이 중 외국환평형기금은 시중은행이 이를 정부로부터 빌리더라도 수출기업 대상의 대출용으로만 사용범위가 제한돼 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IB 쪽은 길게는 몇 십년 동안 자금을 운용해야 한다는 점에서 정부가 나서서 자금을 융자해줄 필요성이 있어 보인다"며 "민간은행들이 직접 참여할 수 없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또한 정부가 국내 은행을 끼고 들어가는 방식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은행들의 요구에 정부 당국은 난색을 표하고 있다. 시중은행의 IB사업 지원을 위해 보유외환을 사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 확고하다. 게다가 외환보유액이 감소할 경우 자칫 국가신용등급 하락으로 은행의 외화 조달비용이 높아질 수도 있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지금껏 비싼 돈을 주고 관리해온 외화를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을 앞둔 현시점에서 은행들에 제공한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며 "보유외환을 유사시에 활용하지 못할 경우 외환을 보유하는 의미 자체가 없다는 점에서 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양철민기자 chopin@sed.co.kr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