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 15년(1433) 12월 5일에 ‘금주령의 족자를 경외 각 관청에 걸어놓게 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예조에서 아뢰기를, ‘이번에 반포한 술을 경계하는 교서를 경외 각 관아로 하여금 족자를 만들어서 청당의 벽에 걸어 두고 항상 경계하는 마음을 갖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것이다.
조선시대 왕들은 흉년이 들거나 또는 풍속의 문란 등을 염려하여 간혹 금주령을 내렸는데, 금주령의 내용이나 반포한 이후 실제 행형(行刑)한 예들을 보면 왕들의 서로 다른 면모를 조금이나마 짐작하게 한다.
가령 영조의 경우 52년의 재위기간 동안 금주령을 단행한 횟수가 50회에 이르러 재위기간이 내내 금주기간이라고 할 정도로 많았을 뿐 아니라 17회에 달하는 행형 횟수나 영을 어긴 자에게 가한 형벌의 가혹함에서도 역대 왕들 가운데 단연 앞선다. 영조실록에 ‘선전관 조성이 술 냄새가 나는 빈 항아리를 가지고 임금 앞에 드리자, 임금이 진노하여 친히 남문(南門)에 나아가 윤구연을 참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관료들이 금주령 기간 동안 술을 마시다 유배 또는 파직, 더 나아가 죽음을 당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던 것으로 손꼽히는 영조의 면모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와는 달리 세종이 내린 ‘계주교서(戒酒敎書)’를 읽어보면 “대체로 들으니, 옛적에 술을 마련하는 것은 술을 마시는 것을 숭상하기 위한 것은 아니고, 신명을 받들고 빈객을 대접하며, 나이 많은 이를 부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제사 때에 술 마시는 것은 술잔을 올리고 술잔을 돌려주고 하는 것으로 절차를 삼고, 회사(會射) 때에 술 마시는 것은 읍양(揖讓)하는 것으로 예를 삼는다. 향음(鄕飮)의 예는 친목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고, 양로의 예는 연령과 덕행을 숭상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건만…”이라고 교서를 시작한다.
술의 폐해를 설파하거나 엄포를 놓기 전에, 술이 가지고 있는 근본정신을 깨닫게 하려는 뜻을 먼저 이야기하는 교서는 마치 어버이가 자식에게 훈육을 하는 듯하다. “명년 정월부터 경외에서 술 빚는 것을 금하라고 명하였다. 하교하기를 …”로 시작하는 영조 때 금주 전교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세종의 면모를 짐작케 하는 술과 관련한 일화가 하나 더 있다. 집현전 학사였던 남수문은 문장에 능하였다. 그러나 그는 술을 너무 좋아해 항상 정도에 지나쳤다. 세종은 그를 아끼는 마음에 크게 나무라지는 않고, 술을 마시더라도 하루에 석 잔을 넘기지 말 것을 명하였다. 그 뒤로부터 남수문은 술을 마셔도 석 잔을 넘기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다만 잔의 크기 매우 컷을 뿐. 세종께서는 이를 듣고 진노한 것이 아니라, “내가 술을 조심시킨 것이 오히려 많이 마시게 했구나”라며 웃고 말았다고 한다.
세종시대라고 흉년과 기근이 왜 없었겠는가. 태평성대는 그냥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세종시대에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배출되어 과학, 인문 등 모든 학문과 예술 분야에서 르네상스를 구가했던 것은 뛰어난 인재와 그들을 올바로 후원한 성군이 함께 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미래는 인재 양성에 답이 있다고 한다. 다시한번 마음을 모아 세종 년간과 같은 시대가 오기를 꿈꾸게 되는 요즘이다. /이화선 사단법인 우리술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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