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어도 먹어도 질리지 않아’
50여년간 한국인의 대표적인 간편식으로 사랑받아온 라면. 새로운 라면 출시 소식은 우리로 하여금 슈퍼로 달려가 포장지부터 면발, 스프, 건더기까지 샅샅이 뒤져보게 하는 설렘을 안겨줬다. 라면은 시대에 따라 면발이면 면발, 국물이면 국물 등 진화를 거듭해 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라면의 히트 여부를 판가름하는 것은 역시 국물. 지금껏 대세 라면의 뒤엔 늘 매력 만점의 ‘국물’이 있었다. 2016년 새해엔 또 어떤 국물이 대세를 잡게 될까. 우선 라면 국물의 50년 역사를 돌아 보자.
▲ 가정식 → 매운맛 → 웰빙→ 중화요리로 진화한 라면 국물
1963년 9월 한국에 첫선을 보인 라면은 ‘삼양라면’의 국물은 닭고기 맛. 닭기름에 튀긴 면과 닭고기 국물로 맛을 낸 스프였다. 포장지에 박힌 것도 우람한 닭 한 마리. 김치찌개 한 그릇이 30원이었던 당시 닭고기 맛 라면은 단돈 10원으로 기름지고 싱겁고 순한 맛이었지만 배고픈 시절이었기 때문에 ‘닭고기라면’은 잘 팔렸다. 60년대 정부는 만성적인 식량 부족 문제를 라면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라면에 ‘분식의 총아’, ‘식량난 해결의 역군’ 등의 별칭을 붙이기도 했다. 당시 라면은 쌀을 대신한 주식이자 대표적 서민음식으로 등극하며 가정식 국, 탕, 찌개 맛 등 국물이 주를 이뤘다. 농심은 70년에 ‘소고기라면’을, 삼양은 72년 ‘육개장 사발면’을 출시했다. 육개장 사발면은 하루에 23만개가 팔리는 등 판매 이래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80년대 라면은 국물이 조금씩 맵고 얼큰해졌다. 82년 농심은 차별화된 국물 맛을 내기 위해 안성에 스프 전문공장을 준공했다. 당시 출시한 ‘너구리’(82년), ‘안성탕면’(83년) 국물은 열풍을 강제적으로 식품에 불어주어 건조하는 열풍 건조법 대신, 얼음을 승화시켜 수분을 제거해 건조물을 얻는 동결 건조법을 택해 시원하고 얼큰한 국물 맛을 그대로 살려내도록 했다. 더 구수하고, 더 진하고, 더 얼큰한 맛을 강조하며 사골을 푹 고아냈다는 곰탕, 설렁탕 등 깊은 맛 시리즈 출시가 이어졌다.
1986년 농심은 ’신라면‘을 출시, 라면 국물 맛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 기존에는 국, 찌개 등 기존 식탁에 올려지는 국물 맛을 모방했다면 당시 신라면은 매운 맛을 앞세웠다. ‘너무 맵다’는 반응이 지배적이었지만 농심은 매운맛이 오히려 차별화 요소가 될 것이라며 제품 출시를 독려했다. 신라면은 출시 3개월 만에 판매액 30억원을 기록, 출시 2년 만에 라면 시장의 절반 이상(50.6%)을 장악하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매운맛을 주도하며 등장한 신라면은 2014년까지 국내 누적판매량 240억개, 국내 연간 판매량 4,800억원, 해외 판매액 7,000억원의 놀라운 매출실적을 올리면서 2조원 라면 시장에 하나의 브랜드로 25%의 점유율을 차지하는 진기록을 남기도 했다. 농심 신라면 이후 라면 시장은 97년 “자신있는 분만 드십시오”라는 광고 카피가 화제가 된 ‘쇼킹면’, 오뚜기 ‘열라면’, 풀무원 ‘꽃게짬뽕’, 팔도의 ‘남자라면’ 등 ‘맵고 빨간 국물’이 시장을 주도하기 위해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90년대와 2000년대에는 꾸준히 매운 맛에 대한 인기와 동시에 ‘웰빙 국물’이 대세로 떠올랐다. ‘오가닉’, ‘로하스’라는 단어가 뜨면서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칼로리를 낮추고 화학첨가물을 줄이며 영양을 강조한 기능성 라면이 등장했다. 농심은 ‘고급 라면’으로 이름 붙이며 93년 ‘순두부 뚝배기 라면’을 출시, 불과 1년 사이에 이와 비슷한 라면은 4개사 7개 제품으로 늘어났다. 이후 ‘뚝배기 콩나물 해장국’을 선보이며 가격도 1,000원대로 올려 맛과 질을 동시에 추구한다는 프리미엄 마케팅을 선보였다. 95년 풀무원은 스프에 MSG를 넣지 않은 ‘생라면’으로 라면 시장에 진출했다. 제품의 유통기한을 5일로 한정해 ‘건강’, ‘웰빙’을 강조하기도 했다. 당시 식품 업계에서는 “고급 라면의 등장은 소비자들의 생활 수준 향상과 입맛의 다양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추세”라고 설명했다.
▲면발도 인기지만 아직까지 라면은 ‘국물’이 대세
그러나 웰빙 열풍은 그저 잔물결이었을 뿐, 라면의 ‘강한 맛’을 원하는 추세는 여전히 강력했다. 2011년 잠시 ‘꼬꼬면’ 열풍으로 ‘뽀얀 돼지뼈’, ‘나가사끼 짬뽕’, ‘조개 국물’등 ‘하얀 국물’ 라면이 인기를 끌기도 했지만 ‘매운 맛’을 찾는 사람들은 되레 크게 늘었고 이에 따라 ‘더 매워진 빨간 국물’ 등 신제품이 속속 등장했다. 2015년 농림축산식품부에서 10~40대 500명에게 올해 구매 경험이 있는 라면별 구매 비중을 조사한 결과 ‘빨간 국물 라면’이 94.4%로 1위를 차지했다. 면발의 독특한 식감을 살린 ‘짜왕’과 ‘비빔면’ 등 ‘비벼 먹는 라면’(79.8%)의 구매 비중도 상당했으며 ‘굵은 면발 라면’은 45.6%로 그 뒤를 차지했다. ‘국물 없는 라면’으로 ‘면발’을 내세운 라면이 최근 새로운 화두로 등장했지만 여전히 소비자들은 라면을 먹을 때 ‘국물’에 대한 선호가 큰 것으로 드러났다.
▲2016년도는 ‘짬뽕 국물’
역시 요즘의 라면업계 대세는 ‘짬뽕 국물’이다. 오뚜기 ‘진짬뽕’은 출시 3개월 만에 누적 판매량 4,000만개를 기록, 농심 ‘맛짬뽕’은 출시 2개월 만에 누적 판매량 2,700만개를 기록했다. ‘진짬뽕’의 경우 “중화요리 맛을 내기 위해 ‘불 맛’을 강조하며 직접 일본으로 가 가장 맛있다는 짬뽕집을 찾아가 먹어보기도 하고, 샘플링해 분석도 했다”고 오뚜기 관계자는 전했다. 또 “직접 닭은 끓여 추출한 육수에 홍합, 오징어, 미더덕 등 최적 함량의 해물을 조합해 스프를 개발했다”고 말했다. 농심 관계자는 “안성탕면, 짜파게티, 너구리, 신라면 이후 최근 이렇게 좋은 판매량을 기록한 라면은 없었다”고 말하며 “지난해 ‘짜왕’ 등이 소비자들의 좋은 호평을 받으며 중화풍 프리미엄 라면 시장이 자극을 받았다. 50년간 라면을 판매하면서 잘 팔리지 않는 라면이라도 가능성을 열어두고 다양성을 위해 사업을 지속하는데 올해는 중화풍인 것 같다”고 말했다.
면과 스프, 건더기의 적절한 조화가 최적의 국물 맛을 만들어 내겠지만, 어떤 종류의 맛이든 맛있으면 ‘대세’가 되는 라면. 최근엔 소비자도 원하는 맛을 위해 국물에 카레나 바질 등 독특한 소스나 건더기를 넣어 스스로 맛을 연구하는 등 라면이 조금씩 ‘요리’의 영역으로 거듭나고 있는데…. 다음 라면 시장을 강타할 ‘국물 맛’은 뭘까?
/정수현기자 movingshow@sed.co.kr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