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발전은 여러 분야에서 신세계를 열어젖히고 있다. 컴퓨터를 사용해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겨주는 기계번역(Machine Translation) 기술도 그중 하나다. 20세기에 탄생한 기계번역은 디지털기술 발달 등에 힘입어 눈부시게 진화하고 있다. 세계 기계번역 솔루션 시장의 넘버원 기업으로 꼽히는 시스트란 인터내셔널의 최창남 대표를 만나봤다. 김윤현 기자 unyon@hmgp.co.kr 사진 차병선 기자 acha@hmgp.co.kr
미국과 옛 소련의 냉전이 한창이던 1968년. 미국 국방부는 소련의 동향을 파악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소련의 움직임에 관한 각종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기 위해서는 러시아어를 영어로 번역해야만 했다. 하지만 러시아어에 능통한 전문가들이 많지 않았다. 이때 미국 국방부는 러시아어를 영어로 신속하고 원활하게 번역하기 위한 모종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러시아어를 영어로 번역해주는 기계번역 기술의 개발이었다.
얼마 후 언어처리 전문가인 피터 토마 박사가 설립한 시스트란(SYSTRAN)이 번역 기술 개발업체로 낙점됐다. 시스트란은 세계 최초의 기계번역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고, 마침내 미국 국방부의 갈증을 풀어줬다. 시스트란은 1980년 오너가 바뀌면서 프랑스로 본사를 이전했고, 그 후로도 기계번역 솔루션 분야에서 세계 최고 지위를 유지해나갔다.
그랬던 시스트란이 지난 2014년 또 다시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한국 토종 번역 솔루션 기업 씨에스엘아이와의 합병을 통해 시스트란 인터내셔널로 거듭난 것이다. 특히 놀라운 것은 합병 주체가 씨에스엘아이라는 점이다. 한국 기업이 세계 최고의 번역 솔루션 기업을 품에 안은 것이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S 번역기’ 프로젝트가 맺어준 인연
최창남 시스트란 인터내셔널 대표가 말한다. “몇 년 전에 씨에스엘아이가 삼성전자로부터 갤럭시S4에 탑재할 다중 언어 번역 솔루션 개발 주문을 받았습니다. 당시 씨에스엘아이는 한·중·일·영 4개국어 기반으로만 번역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삼성전자는 세계 주요 언어를 더 추가해달라고 의뢰했어요. 게다가 개발 기간도 아주 짧았죠.
그때 씨에스엘아이는 시스트란을 협력 파트너로 삼아 갤럭시S4 ‘S 번역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세계 최고 번역 솔루션 기업인 시스트란 기술진도 씨에스엘아이의 역량에 깜짝 놀랐죠. 그런 와중에 두 회사가 합병하면 매우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다는 의견이 제기됐는데, 때마침 투자자들이 그 가능성을 보고 씨에스엘아이의 시스트란 인수 자금을 투자하면서 양사의 합병이 이뤄지게 된 겁니다.”
과거 기계번역 시장은 이른바 니치마켓(Niche Market: 틈새시장)이었다. 말 그대로 시장 규모가 큰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이 시장은 연 평균 16%의 성장률을 나타낼 만큼 성장성과 잠재력이 커지고 있다. 구글, 마이크로소프트(MS) 등 글로벌 거대 IT 기업들은 자신들의 비즈니스 영향력 확대를 위해 기계번역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기도 하다. 흥미로운 것은 구글과 MS도 과거에는 로열티를 지불하고 시스트란의 번역 솔루션을 사용했었다는 점이다.
사실 구글과 MS가 현재 제공하고 있는 무료 번역 서비스는 번역 품질이 그리 높지 않다. 기계번역 솔루션 분야가 갖고 있는 기술장벽도 문제이지만, 인터넷을 이용하는 불특정 다수의 대중에게 제공되는 무료 서비스의 한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시스트란 인터내셔널은 기계번역 솔루션의 원조이자 최고 기술력을 갖춘 기업으로서 차별적인 경쟁력과 번역 품질을 자랑하고 있다. 일례로 시스트란 인터내셔널이 번역을 지원하는 언어쌍(Language Pairs: 양방향으로 번역되는 두 언어의 조합)은 무려 135개에 달한다. 이는 다른 어떤 기계번역 솔루션 기업도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수준이다. 당연히 50년 가까운 업력을 통해 쌓아 올린 노하우와 기술력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아울러 시스트란 인터내셔널의 번역 솔루션은 ‘규칙 기반’ 번역과 ‘통계 기반’ 번역의 장점을 통합한 이른바 ‘하이브리드 기계번역 엔진’을 활용하기 때문에 번역 품질이 매우 우수하다. 규칙 기반 번역은 특정 언어의 규칙을 토대로 번역하는 것을 뜻한다. 반면 통계 기반 번역은 방대한 문장 데이터를 축적한 다음 사용 빈도 수가 높은 표현을 매칭시키는 방식의 번역이다. 구글, MS 등이 이 방식을 사용한다.
‘하이브리드 엔진’ 활용해 번역 품질 우수
규칙 기반 번역은 정확도가 높은 대신 개발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고, 통계 기반 번역은 정확도는 떨어지지만 개발 시간과 비용이 적게 든다. 서로 장단점이 뚜렷한 셈이다. 하지만 시스트란 인터내셔널은 두 가지 번역 방식을 융합한 하이브리드 번역 엔진을 사용하기 때문에 번역 품질과 번역 효율성 모두 강점을 지니고 있다.
“통상적으로 기계번역의 번역률이 60% 수준이면 어느 정도 문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번역률이 80% 이상 되면 꽤 괜찮은 수준이라고 평가되죠. 하지만 번역률 100%라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하는 번역도 완벽할 수 없거든요. 저희 시스트란 인터내셔널의 솔루션을 통해 번역된 문장 수준은 평균적으로 사춘기 청소년의 언어 구사력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특정 고객의 니즈에 맞춘 번역 솔루션은 높은 번역률을 나타내죠. 일례로 한국특허정보원이 사용하고 있는 한·일 번역 솔루션은 90% 이상의 번역률을 보입니다.”
최창남 대표는 글로벌 소프트웨어 기업 오라클 출신이다. 그는 한국을 비롯해 일본 및 아시아·태평양 시장에서 오라클의 신규 사업모델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경험을 갖고 있다. 그는 옛 씨에스엘아이의 창업자이자 대주주(현재도 시스트란 인터내셔널의 대주주이다)의 제안을 받고 2015년 1월 대표이사로 취임했다. 두 사람은 8년 넘게 신뢰를 쌓아 온 사이다.
최창남 대표는 말한다. “사실 씨에스엘아이와 시스트란의 합병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게 가능할까 반신반의했어요. 그런데 진짜 일이 성사되더군요. 시스트란은 기계번역 시장에서 세계 1위 기업이죠. 하지만 합병을 통해 더 높은 단계의 진정한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제가 글로벌 기업에서 쌓은 경험이 도움이 되겠다고 판단해 새로운 도전에 나서게 됐습니다.”
최창남 대표는 시스트란 인터내셔널 최고경영자로서 무한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그는 “주주, 투자자, 직원들을 위해서라도 회사를 더욱 성장시켜야 한다”며 “시스트란과 씨에스엘아이의 합병으로 탄생한 시스트란 인터내셔널은 벤처 정신으로 무장한 ‘글로벌 벤처’를 지향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시스트란 인터내셔널의 미래 성장동력을 이미 설정해 놓았다. 우선 기존 기업 고객 시장을 대대적으로 확대하기 위해 오라클, SAP등 글로벌 IT 기업들과 협력 영업을 강화해나간다는 구상이다. 지금까지 시스트란 인터내셔널은 주로 기업의 번역 업무 담당부서를 고객으로 삼아 왔지만, 앞으로는 글로벌 사업을 전개하는 기업들의 업무 영역 전반을 신시장으로 개척한다는 것이다. 가령 세계 곳곳에 사업장을 두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의 고객관계관리(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부서나 콜센터가 시스트란 인터내셔널의 번역 엔진을 사용하게 되면 업무 효율을 크게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기업 고객 시장 잠재수요 집중 공략
나아가 현재 세계 IT 산업의 3대 메가트렌드인 사물인터넷(IoT), 빅데이터, 클라우드 컴퓨팅 분야에 진출하는 것도 핵심적인 신성장동력으로 삼고 있다. 이 3개 시장은 엄청난 성장성과 잠재력을 갖고 있다. 여기에 시스트란 인터내셔널의 핵심역량인 다국어 번역과 음성인식 기술을 접목해 신규 수요를 창출한다는 것이 최창남 대표의 복안이다.
그는 말한다. “빅데이터 분야만 하더라도 연 평균 24%의 높은 성장률을 보이는 데다, 세계 시장 규모가 약 28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습니다. 시스트란 인터내셔널은 반세기 동안 쌓아온 기계번역 노하우를 바탕으로 IT 분야에서 높은 경쟁력을 가진 기업들과 협업을 통해 새로운 성장동력을 키워나가려고 합니다. 우리의 핵심역량을 접목해 신규 시장을 창출하면 우리의 파이도 저절로 커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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