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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사는 30대 직장인 김모씨는 최근 수년간 휴가 때마다 해외여행을 가고 있다. 정기 휴가는 물론이고 설이나 추석에도 미리 차례를 지내고 해외로 나간다. 김씨는 "한두 번 가다 보니 이제는 해외여행이 국내여행보다 오히려 편한 느낌을 받는다"며 "평소 직장에 나갈 때는 편의점에서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는 등 소비를 줄이고 있지만 영국 런던 등 해외에 나가서는 미슐랭 별을 받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는 등 자유롭게 돈을 쓰는 편"이라고 말했다.
해외여행객·소비액이 사상 최대치를 경신하면서 김씨처럼 국내에서는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고 해외에서 몰아서 돈을 쓰는 '신(新)소비 패턴 족'도 늘어나고 있다. 당장 많은 직장인들이 평소에 백화점 등에서 눈여겨봤다가 해외여행 때 구입해 들여오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 되고 있다. 이들은 한국에서 소비를 해도 물가는 다른 나라에 비해 낮지 않은 반면 특별히 대접 받는다는 느낌을 갖지 못해 외국에서 돈을 쓴다고 말한다. 실제 지난해 서울의 물가는 세계 133개 도시 중 9위(영국 경제분석기관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유닛(EIU) 조사)를 차지해 도쿄(11위)보다도 높았다. 특히 옷값의 경우 서울은 미국 뉴욕보다도 50%나 비싸 싱가포르와 함께 세계 1위 도시에 올랐다. 김씨는 "수입 의류의 경우 유통구조의 거품 등으로 외국에서 사는 것에 비해 너무 비싸 필요한 품목을 메모해뒀다 해외여행 때 사서 들어온다"고 말했다.
한국의 질 낮은 서비스 수준도 신소비 패턴 족이 늘어나는 주요 요인이다. 30대 주부 박모씨는 "백화점에서 옷이나 구두를 사고 싶어 매장을 들러도 직원들이 위아래로 훑어보고 아무것도 사지 않고 나올 때는 따가운 시선을 줄 때가 있어 유쾌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한국에서 택시를 타려고 해도 짧은 거리를 가면 승차거부를 당하거나 운전기사가 난폭운전을 하는 경우가 많다"며 "이웃나라 도쿄에서는 1만원짜리 물건을 하나 사도 대접 받고 택시를 타도 기사가 하얀 장갑까지 끼고 극진한 대우를 해준다. 한국에서 쓸 돈을 아껴 일본 등 해외에서 쓰는 편"이라고 말했다.
'신소비 패턴 족'과 별개로 국내여행을 하고 싶어도 효용이 작아 해외여행을 택하는 사람도 많다. 정부청사의 이전으로 가족과 함께 세종시로 이사 온 40대 공무원 주모씨는 "서울에 비해 전국 방방곡곡을 여행하기 편하다는 주변의 말을 듣고 주말마다 몇 군데 여행을 다녔지만 낙후된 인프라, 특색 없는 볼거리 등으로 여행에서 얻을 수 있는 만족도가 낮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가족과 함께 전주에 다녀왔는데 주차시설이 부족해 애를 먹었고 비빔밥을 먹으려 해도 '원조'라고 쓴 곳이 너무 많아 결국 별 맛 없는 비빔밥을 비싼 돈 주고 먹고 돌아왔다"고 한숨 쉬었다.
해외소비가 급증하면서 우리 경제 선순환 구조에도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 정상적인 경제라면 '국내 소득 증가→국내 소비→기업 매출 →고용 및 임금 상승→소비 증가세 가속'이라는 선순환이 나타난다. 하지만 한국의 경우 국내에서 벌어들인 소득이 상당 부분은 노후대비로, 또 대출상환으로 빠져나가고 있는 상황에서 또다시 해외소비 유출이 커짐에 따라 국내 경제 성장세는 더욱 제약 받고 있는 것이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해외여행 소비가 경제성장률만큼만 늘고 나머지(9,400억원)가 국내 민간소비로 쓰였다면 1만5,000명이 추가로 고용되고(2013년 산업연관표 기준) 1조6,000억원의 생산유발 효과(경제효과)가 나타날 수 있었다. 임희정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내 여행지는 해외 유수 여행지와 가격은 비슷한데 효용은 작다"며 "중장기적으로 국내여행의 격을 높이고 서비스 수준을 향상해 해외여행 수요를 흡수할 수 있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혔다. /세종=이태규기자 classic@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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