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은 비단 발전에만 활용되는 에너지가 아니다. 의료용 방사성 동위원소 생산을 비롯해 비파괴 검사, 식품 멸균, 고기능성 식물자원 육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인류의 삶의 질 증진에 기여하고 있다. 특히 21세기 들어 원자력의 가치가 새삼 부각되고 있는 분야가 하나 있다. 미래 우주탐사의 근간 에너지원 역할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 2013년 미국 항공우주학계에서는 미국의 우주탐사 프로젝트가 전면 중단될 수 있다는 위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주탐사선과 로버의 동력원으로 쓰이는 원자력 전지의 원료인 플루토늄-238(Pu-238)의 부족이 그 이유였다.
실제로 당시 미 항공우주국(NASA)의 Pu-238 보유량은 35㎏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우주탐사선에서 활용 가능한 고품질 Pu-238는 단 3개의 원자력 전지를 만들 수 있는 17㎏뿐이었다. 문제의 심각성을 직시한 NASA와 미에너지부(DOE)는 즉각 대책 마련에 돌입했고, 러시아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했던 Pu-238의 자국 생산 재개를 결정했다.
이는 우주탐사에 있어 원자력에너지의 가치와 존재감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다. 원자력을 빼놓고는 성공적인 우주탐사를 논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우주탐사의 필수 에너지원
원자력에너지가 동력원으로서 우주탐사에 쓰인 것은 미국의 항법위성 ‘트랜짓 4A(Transit 4A)’가 효시다. 1961년 발사된 이 위성에 이른바 ‘방사성 동위원소 열전기 발전기(RTG)’로 불리는 원자력 전지가 탑재됐다.
이후 NASA에서만 아폴로 프로그램을 필두로 목성 탐사선 ‘갈릴레오호’, 토성 탐사선 ‘카시니호’, 명왕성 탐사선 ‘뉴호라이즌호’에 이르기까지 27개 탐사선에 총 46개의 RTG가 사용됐다. 러시아연방우주국(RSA)을 포함하면 그 숫자는 80여개에 이른다.
특히 50여 년간 검증된 안정적 기술력을 바탕으로 원자력 전지의 활용처는 로버로도 확장되고 있다. 2012년 화성에 안착한 NASA의 ‘큐리오시티’ 로버에 ‘다용도 RTG(MMRTG)’가 채용된 것이 기폭제가 됐다. 효용성을 확인한 NASA는 2020년 발사될 화성탐사선 ‘마스 2020’의 로버에도 MMRTG를 장착할 예정이다.
한국원자력연구원 동위원소이용연구부 김종범 박사에 따르면 MMRTG는 전력과 열에너지를 동시 제공한다. 김 박사는 “열에너지는 영하 수백℃를 넘나드는 우주공간과 외계행성에서 탐사선이나 로버의 기계장치가 동결되지 않도록 작동온도를 유지하는데 이용된다”며 “과거에 별도로 탑재했던 열 공급 유닛과 RTG를 통합한 것으로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많은 에너지원 가운데 이처럼 원자력이 낙점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예컨데 잠재 경쟁자인 배터리는 중량대비 에너지밀도가 낮고, 수명도 짧다. 화성까지 약 8개월, 명왕성까지 10여년의 시간이 소요됨을 감안하면 우주탐사 분야에서의 채용은 사실상 불가하다고 볼 수 있다.
태양전지 역시 수명은 무한한 반면 전력 생산량이 적어 대형 탐사선과 로버, 장기 우주탐사의 주에너지원으로는 적합지 않다. 햇빛이 비치지 않는 지역과 시간대에 무용지물이 되고, 패널에 먼지가 쌓이면 효율이 급전직하 된다는 점도 태양전지만으로는 탐사선이나 로버를 장기 운용하기 어려운 요인이다.
향후 전개될 유인 우주탐사에 있어서도 승무원들의 우주방사능 피폭을 최소화하려면 탐사선이 가급적 신속히 목적지에 도달해야 하는데, 화학 연료나 태양전지 추진시스템으로는 원자력만큼 빠른 속도를 내기 어렵다.
김 박사는 “현재로선 최소 10년 이상의 수명과 충분한 발전량, 안정적 전력공급이라는 심우주 탐사의 기본 3박자를 충족시킬 에너지원은 원자력이 유일하다”고 밝혔다.
2020년 달 탐사 성공의 열쇠
우리나라는 올해로 원자력 도입 60년을 맞았고, 최초의 원전인 고리1호기가 준공된지도 38년이 된다. 그동안 원전 수출국의 반열에 오를 만큼 눈부신 기술발전을 이뤘지만 원자력 전지는 우주항공 분야와 관련이 높은 탓에 미국, 러시아, 유럽 같은 우주강국에 비해 활발한 연구가 이뤄지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올해 한국형 달탐사 프로그램이 본격 가동되며 2018년 시험용 달 궤도선, 2020년 달 궤도선과 착륙선, 로버의 발사를 위한 연구개발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이를 성공으로 이끌려면 원자력 전지의 개발이 필수적이며, 현재 김 박사가 소속된 원자력연 손광재 박사팀이 그 중책을 맡고 있다.
연구팀에 의하면 달 탐사에 활용될 원자력 전지는 독자개발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비공식 루트로 NASA와 접촉해본 결과, RTG의 경우 기술이전 원천 불가 항목에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에 연구팀은 2018년 시험용 궤도선 발사 때까지 기술개발과 시제품 제작 등 1단계 선행연구를 완료한 뒤 2020년의 발사에 맞춰 기술고도화 및 안정성을 제고해 나가겠다는 2단계 전략을 수립한 상태다.
김 박사는 “열출력 120W, 전기출력 5W의 원자력 전지 개발을 목표로 달탐사 프로그램 주관기관인 한국항공우주연구원과의 협약 체결을 앞두고 있다”며 “궤도선과 착륙선, 로버에 모두 탑재될지 선별 탑재될 지는 2단계에서 확실히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원자력 전지에 활용할 방사성 동위원소(핵종) 역시 아직은 확정되지 않았다. 다만 Pu-238과 스트론튬-90(Sr-90)이 후보로 압축되고 있으며, 이중 Sr-90의 간택이 유력시되는 분위기다. Pu-238은 가장 일반적인 원자력전지용 열원이지만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데다 수급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Sr-90은 Pu-238과 비교해 출력당 중량은 상승하지만 수급 상황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의 상황에 가장 적합한 핵종으로 보고 있다. 특히 지난 해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안 발효로 국내 자체 생산 가능성이 열린 것도 Sr-90에 힘이 실리는 부분이다.
김 박사는 “시험용 궤도선에는 원자력 전지가 탑재되지 않지만 2018년까지 시제품 개발을 완료할 계획인 만큼 금명간 어떤 핵종이 낙점될지 판가름 날 것”이라고 전했다.
우주개발시대의 원자력
21세기는 우주탐사를 넘어 우주개발로 나아가는 변화의 시기다. 이에 맞춰 원자력도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그 방향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된다. Pu-238을 대체할 원자력 전지용 방사성 동위원소와 차세대 RTG, 그리고 원자력 추진로켓의 개발이 그것이다.
먼저 Pu-238의 대체재는 아메리슘-241(Am-241)과 폴로늄-210(Po-210), 이트륨-90(Y-90), Sr-90 등이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유럽우주국(ESA)이 Am-241, 러시아연방우주기구(RSA)는 Po-210, 그리고 우리나라는 Sr-90에 관심이 많다. 이중 Am-24이 가장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데 핵폐기물에서 저렴하게 얻을 수 있고, 반감기가 432년으로 Pu-238(88년)보다 5배나 길어 장기 심우주 탐사에 적합하다는 평가다.
차세대 RTG는 ‘첨단 스털링 방사성동위원소 발전기(ASRG)’가 대표적이다. NASA의 설명에 따르면 스털링 엔진과 RTG 기술을 융합, 동일량의 Pu-238로 기존 RTG 대비 4배의 전력 생산이 가능하다고 한다. NASA가 2017년까지 2개의 시제품을 완성할 예정인데, Pu-238 부족 사태에 대응하면서 RTG의 효율 극대화를 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원자력 추진로켓의 경우 미래의 유인 심우주 탐사 등에 대응하기 위한 중장기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NASA가 열핵추진(NTP) 로켓을 장착한 화성 유인탐사선 ‘코페르니쿠스’호의 기초연구를 수행하고 있고, ESA와 러시아도 각각 핵융합 추진 시스템과 소형 원자로 기반이온추진로켓을 개발 중이다.
덧붙여 항공우주 전문가들은 향후 원자력이 달 기지나 화성 식민지 등 미래 외계행성 거주구의 동력원으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내다본다. 심우주 탐사선이나 로버와 마찬가지로 외계행성 거주구에 필요한 동력과 열원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최적의 에너지원 또한 원자력이기 때문이다. 지난 60년간 깨끗하고 안정적인 전력생산을 통해 인류 산업발전에 공헌해온 원자력이 우주에서 또 한 번 성공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2,350Wh
전력변환효율 5%인 Pu-238 1g으로 10년간 얻을 수 있는 전력량. 동일 질량의 리튬이온전지 대비 1만배나 많은 양이다.
3,516억원
한국경제에 미치는 원자력 전지 기술 개발의 파급 효과. 직접편익이 2,845억원, 간접편익이 671억원으로 분석됐다. (출처: 한국형 달탐사 사업 예비타당성 보고서)
RTG- Radioisotope Thermoelectric Generator.
ASRG - Advanced Radioisotope Generator.
NTP - Nuclear Thermal Propul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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