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국세청이 3일 개청 50주년을 맞는다. 국세청 반세기는 대한민국의 경제발전만큼이나 드라마틱하다. 개청 초기 다양한 일화는 물론이고 지난 1980년대 장영자·이철희 어음 파동, 명성그룹 세무조사 등 과거 굵직한 정치·경제 사건의 중심에는 항상 국세청이 있었다.
국세청은 지난해부터 대대적인 세무조사를 줄이는 대신 성실 신고로 납세를 유도하는 세정 패러다임으로 전환했다. 세무조사는 현 정부 초기인 2013년 1만8,000여건에서 2년 연속 감소해 지난해는 1만7,000여건에 그쳤다. 개청 첫해 700억원에 불과했던 세수는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200조원 시대를 열었다. 부동산 거래가 살아나고 담뱃세 등이 인상된 영향이지만 빅데이터에 기초해 성실 신고를 지원한 영향도 크다는 평가다.
근로장려금(EITC)과 자녀장려금(CTC)을 1조7,100억원가량 저소득층에 지원한 것도 눈에 띈다. 2009년부터 지원한 EITC는 지난해 처음으로 1조원을 돌파했다. 과거 세금만 걷던 기관에서 세수 확보와 복지 세정을 동시에 실현하는 기관으로 거듭나고 있는 셈이다.
국세청의 시작은 박정희 정부가 2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준비하던 19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제개발을 위한 막대한 재정 조달을 고민하던 박 대통령에게 경제고문단으로 한국을 찾은 리처드 머스그레이브 하버드대 교수는 미국의 국세청(IRS) 같은 독립 징세 기관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이듬해 1월 국세청 설립 발표와 두 달 만인 3월 개청까지 말 그대로 전광석화처럼 움직였다. 정식 본청을 구할 시간이 없어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2가의 '노라노 양재학원' 건물에 임시청사를 마련해 출발했다. 초대 국세청장은 군 출신인 이낙선씨였다. 이 청장은 박 대통령이 지시한 세수 700억원 목표 달성 의지를 다지지 위해 관용차 번호판을 '1-700'으로 바꿀 정도였다. 그는 박 대통령이 국세청 개청 당시 친필로 써준 '견금여석(見金如石·사진)'이라는 휘호를 새긴 넥타이를 매고 세무조사에 필요한 용품을 담는 007가방(사진)을 직원들에게 나눠줬다.
국세청은 대한민국 경제의 빛과 그림자를 함께했다. 1960년대는 안정적인 세수 확보에 방점을 찍었고 1970년대는 물가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부가가치세를 도입했다. 부가세 도입은 조세저항을 불러 유신체제 몰락을 촉발한 부마항쟁의 원인 중 하나였다. 국세청 역사에서 세무조사를 빼놓을 수 없다. 1982년 어음 사기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장영자·이철희씨 부부 사건, 신흥 레저그룹으로 떠오르던 명성그룹의 세금포탈 등이 국세청 세무조사를 통해 정리됐다. 또 박정희·전두환 정권 시절 세무조사로 율산, 국제그룹이 몰락하고 김영삼 정부 시절에는 언론사 세무조사를 하면서 세정이 정치의 도구로 휘둘린다는 비판도 받았다.
정보기술(IT) 발전과 세정도 밀접히 연관돼 있다. 국세청은 1997년 국세통합 시스템(TIS) 개통, 2001년 연말정산 서비스인 홈택스(Hometax) 시스템 구축, 2005년 현금영수증제도 도입, 2006년 연말정산 간소화 서비스 등 일련의 서비스를 도입됐다. 세무조사와 사후검증이 대폭 줄어든 것도 전산시스템 구축과 기업과 개인의 소득을 상세히 파악할 수 있는 빅데이터 덕분이다. 지난해는 2,000억원의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차세대 국세행정시스템을 개발해 세무서비스 기관으로의 발판을 마련했다.
국세청은 개청 50주년을 맞아 변화된 시대에 걸맞게 국민들을 위한 세무 서비스 지원에 더욱 주력할 방침이다. 국세청 관계자는 "3일 세종청사에서 기념식을 열고 '국민과 함께 50년, 미래로 도약하는 국세청'이라는 비전을 선포한다"며 "앞으로도 국민과 함께하는 세정을 펼쳐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김정곤기자 mckids@sed.co.kr
<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