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의 저축성예금 잔액이 사상 처음으로 1,000조원을 넘어섰다. 계속되는 저금리에도 불구하고 주가연계증권(ELS) 등의 파생상품에서 손실을 보거나 박스권에 갇힌 증권시장에 지친 고객들이 다시 은행 문을 두드리기 때문이다.
13일 한국은행 및 금융권에 따르면 올 1월 기준 시중은행 저축성예금 잔액은 1,001조7,056억원을 기록했다. 시중은행 저축성 예금 잔액이 1,000조원대를 기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 2006년 500조원대를 최초로 기록한 이후 10년만에 잔액이 2배이상 증가한 것이다. 시중은행 개인금융부 관계자는 “기업들이 새해에는 상여금 지급이나 회계 부문 등에 대한 문제로 은행에서 자금을 빼기 마련인데 연말대비 연초에 잔액이 증가했다는 것은 그만큼 가계 부문에서 은행에 돈을 많이 넣은 것으로 봐야 한다”며 “기대했던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이 한국은행 금리 인상으로 이어지지 않자 은행에 돈을 묻어두고 투자처를 찾기 위해 시장 추이를 살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항목별로 살펴보면 정기예금 잔액이 571조3,834억원으로 가장 많았으며 보통예금과 이자 차이가 크지 않지만 은행당 1인 1계좌만 가입 가능한 저축예금 잔액이 209조7,922억원에 달했다. 기업자유예금은 기업의 각종 자금 수요 등으로 연말 대비 3조5,000억원 중 157조8,844억원을 기록했다. 서민들의 주요 재테크 수단인 정기적금 또한 36조571억원으로 소폭 줄었다.
은행의 요구불예금 잔액도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요구불 예금 잔액은 지난 1월 사상 처음으로 150조원대인 152조9,924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지난 2009년 7조원대를 기록한 이후 7년 만에 2배가량 증가한 수치다. 박지연 신한PWM 파이낸스센터 PB팀장은 “자산가들만 보더라도 지난 연말부터 불어닥친 경기 불확실성 때문에 금융자산에서 예금이 차지하는 비율을 계속 늘리고 있다”며 “1월 경기가 가장 좋지 않았다고 판단 되지만 이달에도 자산가들의 심리는 여전히 얼어붙은 듯하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ELS나 주식 투자 등으로 큰 손해를 본 자산가들의 예금 선호가 강해 일반적으로 6대 4 정도였던 예금자산 비중이 최근 7대3으로까지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은행들은 이같은 저축성 예금 유입이 달갑지 않다는 입장이다. 지난해 은행을 사실상 먹여 살렸던 가계대출 부문이 올해는 여신심사강화 방안과 부동산 경기 위축 등으로 수익을 내기 어려운 상황에서 돈 굴릴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들어오는 자금 또한 비교적 장기 운용이 어려운 ‘뜨내기’ 자금이 많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1월 1년 이상 2년 미만 정기예금 잔액은 343조6,668억원으로 연말 대비 3조원 가량 줄어든 반면 1년 미만의 단기 정기예금 잔액은 193조9,735억원으로 직전월에 비해 6조원 가량 늘었다.
은행들은 올들어 잇따라 수신금리를 0.1~0.2% 포인트 가량 인하하며 자금 조절에 나서고 있지만 은행으로 몰리는 자금 행렬을 멈추기에는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금융당국이 중점 추진 중인 자산운용관리계좌(ISA)나 계좌이동제 등과 관련한 고객 쟁탈전 때문에 되려 특판 행사를 벌여야 하는 판국이다. 시중은행 고위 관계자는 “은행들이 그나마 저원가성 예금 유치로 활로를 찾고 있지만 관련 마진이 많아 봐야 1% 중반대에 불과하다”며 “중기 대출 또한 대기업 관련 업종 부실 우려 때문에 가뜩이나 시장 개척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자금 운용의 묘수를 찾기가 쉽지 않다”고 밝혔다. /양철민기자 chopin@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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