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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대형 증권사 투자은행(IB) 사업부가 인수합병(M&A) 시장에서 외국계 IB와 회계법인에 낀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하며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외국계 IB는 풍부한 경험과 네트워크를 무기로 5,000억원 이상 대형 거래를 독식하고 회계법인은 면밀한 실사 능력을 앞세워 중소형 M&A 거래를 싹쓸이하고 있지만 증권사 IB는 딱히 내놓을 경쟁력이 없어 고전하는 것이다.
15일 서울경제신문이 올해 1·4분기 진행된 주요 M&A 거래를 분석한 결과 국내 증권사 IB가 매각 주관이나 인수 자문 등 M&A와 관련된 자문을 맡은 건은 사실상 한 건도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초 NH투자증권이 동양생명(1조1,319억원)·쌍용건설(1,700억원)·파르나스호텔(7,600억원) 등 굵직한 거래의 매각을 주관했고 하나금융투자가 중국 안방보험의 동양생명 인수를 자문해 주요 거래를 독식한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통상 외국계 IB, 국내 증권사, 회계법인 등은 M&A 거래에서 매각 측을 대신해 적절한 인수 의향자를 찾고 입찰 등의 전 과정을 주관하거나 인수자 측에 자금 조달·업종 분석·거래 구조 등 재무 전략에 대한 자문 서비스를 제공하고 거래 금액의 1% 정도를 수수료로 챙긴다.
올해 M&A 시장에 생긴 국내 증권사의 '빈자리'는 외국계 IB와 회계법인이 나눠 가졌다. 킴스클럽(골드만삭스)·ING생명(모건스탠리)·두산공작기계(크레디트스위스)·두산DST(크레디트스위스)·로젠택배(JP모간)·알리안츠생명(JP모간) 등 현재 진행 중인 대부분의 중대형 거래는 모두 외국계 IB의 몫으로 돌아갔다. 삼일PwC·삼정KPMG·딜로이트안진·EY한영 등 4대 회계법인들은 전통적으로 강점을 보여온 법정관리 혹은 채권단 구조조정 매물을 독차지했다. EY한영은 연초 최고의 '핫딜'로 꼽히는 동아원·한국제분(동아원그룹) 거래에서 매각 주관사 지위를 따내 거래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했고 현재 현대증권과 국제종합기계 매각을 주관하고 있다. 딜로이트안진은 오투리조트 매각을 성사시켰고 칸서스자산운용·리딩투자증권 매각도 자문하고 있다. 삼일PwC는 재매각을 추진하고 있는 동부건설의 매각 주관사 자격을 따냈다.
국내 대형 증권사 IB가 올 1·4분기에 맥을 못 춘 이유는 외국계 IB, 회계법인들과 비교해 차별화된 경쟁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외국계 IB들은 크로스보더(CrossBorder·국내-해외 기업 간 거래) 역량이 탁월하고 다양한 경험을 축적하고 있어 고도의 전략이 필요한 대형 M&A에서 항상 선순위로 꼽힌다. 최근 시장에 나온 중대형 M&A들 중 국경의 제한이 없는 크로스보더 딜이 많고 복잡한 공식을 풀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국내 IB들은 선택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회계법인들은 기업 회계감사를 통해 구축한 막강한 국내 네트워크를 확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M&A 자문 분야를 미래 성장동력으로 삼아 대대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 대형 증권사 IB들은 회계법인을 앞설 만한 네트워크 경쟁력을 갖추고 있지 못하고 수익성을 이유로 M&A 조직을 축소하거나 현상 유지하는 데 그치고 있다. 실제 국내 대형 증권사들 중 본부급 M&A 자문 조직을 갖춘 곳은 NH투자증권 한 곳뿐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최근에는 대형 증권사 IB들이 수익성이 떨어지는 법정관리 매물은 물론 국내 대기업의 사업 재편 과정에서 나오는 일반 M&A 거래에서도 회계법인에 밀리고 있는 것이다.
외국계 증권사의 한 고위관계자는 "국내 M&A 자문 시장의 지형이 기존 외국계 IB, 국내 증권사, 회계법인의 '3강 체제'에서 외국계 IB와 회계법인의 '2강 체제'로 변화하고 있다"며 "국내 대형 증권사들은 긴 호흡으로 접근해야 하는 M&A 시장보다 단기간에 돈을 벌 수 있는 인수금융(대출) 분야에만 매달리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박준석기자 pjs@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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